남편을 만나기 전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가족과 친지들이 교사의 직업을 택한 사람이 많았는데 그 때문에 나는 교사 외에는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르바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대학생 시절에는 학원 강사로,
졸업 후에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어 해외로 나갔다.
나와는 다른 문화, 언어를 가진 문화권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고
소위 FM, 모범생으로 살아왔던 나는 나의 틀과 생각이 깨어지기 어려웠다.
사회초년생이자 해외에서 홀로 지내며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도 가르치는 것도 너무 힘들어 눈물을 쏟고 답답할 때도 많았던 나는
교사라는 직업이 생각보다 어려워 포기할 생각도 많이 했었다.
방학기간 잠시 한국에 나와 들린 서점에서 한 책을 보게 되었다.
그때 사게 된 책이 나의 삶의 방향을 정하게 되었는데,
파머 J. 파머의 책 <가르칠 수 있는 용기>의 한 구절이었다.
"가르침의 용기는 마음이 수용 한도보다 더 수용하도록 요구당하는 순간에도 마음을 열어 놓는 용기이다."
이 문장은 그간 내가 가져왔던 나의 생각을 부수는 말이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을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해.
그런데 여기까지는 내가 할 수 있어. 그 이상은 무리야."라고 정해놓는 나의 기준을 없애는 말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단계별로 훈련시키셨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한도를 정해 놓지 않고 한번 더 그 창을 여는 용기를 가지는 연습을 하고
결혼 후에는 남편을, 육아하면서는 아이를 통해 나의 한계를 넘어 한번 더 용기 내어 사랑하길 원하신다고 생각했다.
결혼 서약인 예수님께서 나에게 그러하셨듯이 떨어지지도 그치지도 폐하지도 않는 사랑으로 남편을 사랑하겠다고 말한 나의 말을 지킬 수 있게 만드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이라 생각했다.
나의 부모님을 제외한 나를 아는 많은 이들, 또는 모르는 이들은 나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이고, 결단해야 하겠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네.." 라며 에둘러 이혼을 권하였다.
심지어 시댁어른들도.
그분들의 결단은 그런 것이었다.
썩은 부위는 절단하여 버리는 것 같은 결단말이다.
회복되지 않을 것이라 했다.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 했다.
도박은 에미애비도 못 알아볼 것이고 자식까지 팔아먹는 무서운 것이라 했다.
하지만 난 잘라 버릴 수 없었다.
그와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부부였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세기 2:24)
한 몸은 나누어질 수 없었다. 나뉘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말처럼 나는 결단했다.
카지노에 다녀온 남편을 도박중독자인 파렴치한이 아닌,
치료가 필요한 환자이자 죄로부터 구원이 필요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이 필요한 죄인이라는 생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나의 사랑도. 그리스도의 사랑도.
어렸을 적 부모와 떨어져 떠돌이처럼 지낸 그를.
그 어느 누구보다 부족함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리라. 내가 아낌없이 부어주고 부어주리라 생각했다.
세상이 경멸하고 가족 또한 포기하여도
나는 내 안에서 채워지는 사랑이 아닌, 예수님께서 나에게 이미 보여주신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리라.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의 다짐으로 힘겹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용기를 생각하였을 때, 이미 나에게는 그를 향한 넘치는 사랑이 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