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집으로 돌아왔다.
무겁고 무서운 현실과 함께. 빚과 함께였다.
나는 이십 대 후 반까지도 신용카드 한 장이 없는 사람이었다.
대학 새내기부터 시작한 나의 사회생활은 돈의 무서움을 빨리 알게 해 주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을 통해 카드빚이 얼마나 무서운지 세뇌당하다시피 듣다 보니 신용카드를 만드는 것조차 무서워 만들지 않고 내가 가진 한도 안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달랐다.
어렸을 적 부모님과 떨어져 용돈을 받으며 생활하던 그는
다음 달에 조건 없이 주어질 달콤한 돈들과 조금의 잔소리만 들으면 더 달라고 요구해도 수용해 줄 부모가 있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그는 명품을 사는 등 사치하거나 돈을 자주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에는 턱턱 큰돈을 쓰는 사람이었다.
신혼 초에는 장을 보는 것부터 집안의 살림살이를 채울 때 크고 작은 의견갈림이 있었지만 그것이 우리의 집을 뒤흔들 일은 아니었기에 그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었다.
이번엔 달랐다.
카지노에서 그는 자신이 만지지도 못하는 큰돈을 척척 빌려 사용했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이 무엇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었냐 하니 그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마치 명절 세뱃돈을 가지고 신나게 오락실로 가지고 간 들뜬 아이와 같은 그가 그곳에서는 눈에 띄었을 것이다.
가지고 간 돈을 모두 잃었어도 미련이 남아 그곳에서 헤매는 그를 보며 하이에나처럼 달려들어 이리저리 돈을 더 쓰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준 뒤 자신이 아는 사람에게 돈을 빌리게 하고 갚지 못하면 가족에게 독촉하는 식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도박자금으로 사용될 것을 알면서 돈을 빌려주는 계약은 민법상 무효이고 그 가족에게 대환을 요청하는 것도 불법이지만 (나를 제외한) 그와 그의 가족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추가로, 가족이 돈을 대신 갚아주는 것은 도박 중독 치료에서 지양하는 바이다.)
카지노에 나오기 전 그는 신분증을 가지고 나오기 위해 그의 친척, 친구, 지인들에게 이런저런 핑계로 돈을 빌려 그들에게 건네주고 난 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남은 빚과 함께.
처음에는 그가 사채빚을 가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가 스스로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비밀은 오래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쉴 새 없이 울리는 전화, 슬그머니 나가며 전화를 받는 그,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무거운 중국어의 분위기. 나는 그를 불러 세웠다.
전화를 달라고 했다.
거의 뺏다시피 전화기를 받아 상대방에게 물었다.
"얼마를 빚졌어요?"
"...."
"내가 이 사람 와이프예요. 이 사람은 갚을 능력 없다는 거 알죠. 나한테 지금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돈 받을 수 없어요. 도박자금으로 돈 빌려주는 거 못 받는 거 알죠?"
돈을 못 받는 거 알죠?라는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육두문자가 날아왔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부터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었는지, 자기도 중간역할 밖에 안된다는 둥 여러 이야기가 들려왔다.
화가 날 법도 하고 무서울 법도 한데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상대방은 욕을 퍼붓다가 내가 조용하게 가만히 있는 걸 보곤 내가 말하길 기다렸다.
"빌린 돈은 갚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월급날까지 기다려요."
그게 무슨 소리냐며 기한을 정해서 줬다는 둥 그렇다면 돈이 늘어난다는 둥 여러 말이 많았다.
"갚겠다고요. 근데 지금 주고 싶어도 없어요. 받으려면 집으로 와서 나하고 얘기해요. 가져가고 싶은 물건이 있으면 가져가든지요. 그런데 지금부터 내 남편한테 소리 지르고 욕하고 돈 갚으라고 재촉하지 마요. 그럼 신고할 거예요."
난 단호했다. 무서울 것이 없었다.
지금 당장 유용할 돈도 없었고, 물건으로 갚을 수 있다면 정말 그럴 마음이었다.
분명 이 사람도 선하게 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살아가기 위해 저런 방법을 택했으리라 생각해 원금은 돌려주겠다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굴하게 숙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내 남편이 독촉전화를 받는 것을 놔두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런 전화들을 받으며 바싹바싹 말라가는 그를 쳐다보는 게 힘들었다.
나하고는 더 이상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는지,
나에게 얼마를 갚아야 하며 그럼 다달이 얼마씩 언제까지 갚아달라고 말을 하고 그는 전화를 끊었다.
나의 첫 번째 사채업자와의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