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약을 처음 복용하고 2-3년 정도가 지났을 즈음이었다.
의사가 이 정도 기간 동안 약을 먹을 것이라 예상한 시간을 훌쩍 넘었을 때 나는 스스로 약간 불안해졌다.
이러다 평생 우울증 약을 먹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나는 갑상선 기능 저하증으로 인해 때때로 검사결과에 맞춰 신지로이드를 복용하다 멈추기도 했고, 척추분리증과 척주전방전위증을 갖고 있어 허리통증을 줄여주는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해야 했다. 거기다 우울증 약까지 매일 챙겨 먹어야 하다니..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를 지경이었다.
약이 가득 찬 싱크대 윗 선반을 보면 저 많은 약이 다 내 것이네 싶어 살짝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상태가 좀 괜찮다고 느꼈던 날은 약을 한 번씩 거르기 시작했다.
한 달에서 한 달 반 사이 병원에 방문했던 기간이 늘어나 두 달 만에 병원에 찾았을 때 의사 선생님에게 말씀드렸다.
약을 끊어보고 싶어 복용 양을 줄여보았다고.
의사는 그럼에도 상황이 괜찮았다면 약을 더 줄여보자고 말했다.
나는 갑자기 의지에 불타올랐다.
'그래! 좋았어! 이제 약을 딱 끊고 정상적(?)으로 다시 돌아가는 거야!'라고 맘을 먹어보았다.
그때 당시 지방에 근무하고 있던 남편은 다행이라며 약을 끊고 다시 좋아질 것이라고 응원해 주었다.
의사는 약을 끊고 난 후부터 바로 단약 부작용이 시작되는 것은 아니니 힘들면 중간에라도 병원에 오라고 권하였다.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약복용을 중단하여도 그간 체내 축적된 성분들이 남아있어 보통 단약 2-3주 정도가 지나고 나서부터 점차적으로 부작용이 시작된다고 했다.)
그간 나는 약을 바꿀 때마다(새로운 약을 시도할 때마다) 크고 작은 잔병치레를 했었다.
몇 날며칠을 구토와 설사로 고생하여 응급실에 실려간다거나 온몸이 간지러워 피가 날 정도로 긁게 된다거나 등등 소소한 이벤트가 있었다.
단약을 하며 그때보다 심할까라는 안일한 생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나의 단약 부작용은 브레인잽스(Brain zaps)가 시작이었다.
항우울제 중단 증후군이라고 하는 이 증상은 사람에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는데, 나의 경우 어지럼증과 머리와 다리가 찌릿거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처음에는 금단증상이라는 것으로 생각지 못하고 길을 걷다 살짝 머리가 찌릿거리며 휘청하는 정도였다.
점차 빈도와 강도가 세지자 그간 내가 먹었던 약들을 하나하나 검색해 부작용이 어떤 종류가 있을 수 있나 알아보았다.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극단적인 부작용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오기가 생겼다.
이깟 금단증상 따위 이겨내겠어. 사람이 의지가 있으면 못할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어느 날, 아침에 출근을 하려 일어나는데 세상이 빙 돌면서 말 그대로 풀썩 뒤로 꼬꾸라져버렸다.
먼저 일어나 나와 아침인사를 나누려 했던 아이는 깜짝 놀라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엄마 쓰러졌어!"
그 이후 잠깐의 시간이 흘렀을까 난 정신이 들었다.
단약 부작용 중에도 현기증이 있을 수 있지만 이렇게 어지러움이 찾아올지 몰랐다.
응급실에 다녀왔지만 이석증도 아닌 것 같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괜찮아져 집으로 돌아왔다.
먼 곳에서 일하고 있던 남편은 멀리 있던 사이 도박을 다시 시작했었고, 그 이슈는 다시 나를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일주일여가 지나도 어지럼증이 낫지 않자 이석증이 의심되어 이비인후과에 다녀왔다. 진단은 이석증.
단약부작용으로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마니에르병(어지러움증 유발)과 유사해 이비인후과를 다녀오는 경우가 있다하지만 그것도 아니고 나는 이석증이라니. 그건 또 새롭게 얻은 병명이었다.
나는 단약을 포기했다.
멀리서 돌아온 남편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고,
나는 혼자서는 몇 걸음조차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약을 먹고 먹지 않고 가 나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나라를 잃은 패잔병처럼 다시 병원에 찾아갔다.
똑똑.
"어서 오세요 어서 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밝게 인사를 꼭 두 번씩 하시며 환자들의 표정과 눈빛을 보시는 의사 선생님은 내가 앉기도 전에 뭔가를 알고 있는 듯이 말했다.
"힘들었나 봐요."
그 말을 듣자마자 갑자기 속상하고 서럽고 원망스럽고 답답하고 한탄스러운 마음이 터져 눈물이 나와버렸다.
그간의 상담과 진료기간 동안 스펙터클한 인생을 담담하게 전하던 환자가 나아져 약을 끊는다고 하더니 갑자기 힘든 얼굴을 하고 들어와서는 말 한마디에 또르륵 눈물을 흘리지도 못하고 참고 입을 꾹닫고 있으니 의사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의사는 친절히 휴지를 뽑아 나에게 주었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 책상에는 항상 갑 티슈가 환자 쪽을 향해 놓여 있습니다.)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나는 의사에게 약을 끊기에 적합하지 않은 시기인 것 같다고 말했다.
단약 부작용이 생각보다 컸고 남편의 문제도 다시 시작되었다고..
안타까워하던 선생님은 나에게 비타민처럼 다시 약을 먹어보자 말했다.
꼭 약을 끊고 끊지 않아서가 중요하지 않고 그냥 나의 삶이 안정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우울증 약을 먹으면서도 아니 그전에도 나는 행복을 선택했었다.
지금 내가 슬프고 우울하다는 것은 잠시 주춤거리고 있다는 것 그뿐이었다.
잠시 행복을 선택하는 것을 유보했을 뿐이었다.
실제로 약을 먹었기 때문에 내가 행복해지고 안정적인 인간이 된 것은 아니었다.
약을 먹었기 때문에 호르몬의 도움을 받을 순 있겠지만
오늘 하루 어떤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은 스스로의 선택으로 만들어질 결과였다.
나의 힘으로 그 어떤 것도 바꿀 수 없고, 나아질 수없다고 생각했던 그때에,
나는 건강하지도, 부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그때에 행복하기를 결정했다.
그냥 그것이면 되었다.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나의 마음은 달라졌다.
나는 지금도 약을 먹고 때때로 며칠을 거르기도 한다.
언젠가 약을 끊을 수도 있겠지만 그 시점을 정하거나 기대하지도 않는다.
괜찮다.
그저 오늘 하루 내가 만족한 하루였다면,
그것으로 되었다고 믿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