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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코리안

by 징계
ls_0226_1.jpg 때론 기회일지도

나는 술을 좋아한다. 돈 없는 학창 시절엔 술 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신적 고급 방탕이었다. 나는 일과 공부를 병행하는 힘든 미국 유학 생활 중에도 술자리는 빠지지 않으려 했다. 하루는 같이 드로잉 클래스를 듣는 친구가 파티에 초대했다. 말이 파티지 그냥 집에서 술 마시는 거다.


미국 아이들은 술을 참 오래 마신다. 늘 상 파티에 가면 맥주를 들고 세월아 내월아 하면서 다트를 하던지 *비어퐁을 한다. 그렇게 새벽까지 마시고는 새벽에 다이너에 가서 샌드위치나 팬케이크로 해장을 한다.


그날도 역시 맥주만 수북한 파티였다. 나는 맥주를 잘 못 마신다. 배부르다는 이유에서이다. 영어도 서툴고 친한 친구도 많지 않았던 터라 나는 한 켠에서 보드카를 마시고 있었다. 보드카 잔을 들고 있는데 한 친구가 펀넬을 가지고 왔다. 펀넬은 깔때기에 호스가 달려있어 깔때기에 술을 부으면 호스로 술을 한 번에 들이켜게 하는 무식한 음주 소품이다. 그 친구가 나에게 펀넬을 들이밀며 맥주 한 캔을 땄다. 소주 종주국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나는 호스를 입에 물었고 친구는 맥주를 깔때기에 들이부었다. 나는 순간 들고 있던 보드카 잔이 귀찮아서 보드카를 깔때기에 부어 버렸다. 꿀꺽 꿀꺽 꿀꺽. 세 모금에 맥주 한 캔과 보드카 한 잔이 식도를 넘어갔다. 보드카를 맥주에 섞어 펀넬로 마시는 장면을 본 미국 친구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외쳤다.


“You fucking crazy Korean!”


젊은 남자들 여럿이 모이면 경쟁이 과열되는 순간이 있다. 이 날은 내가 그 불씨였던 것 같다. 내 주위로 술 좀 마신다는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처음엔 맥주를 *샷건으로 마시며 배틀을 붙었다. 두 캔을 연속으로 마시니 배가 불렀다. 나는 위스키 샷으로 붙자고 했다. 몇몇은 위스키를 못 마신다며 기브업을 하고 떨어져 나갔다. 두어 명이 나랑 같이 위스키를 샷 잔에 마시기 시작했다. 이때 느꼈다. 미국 사람들은 도수 높은 술을 빨리 못 마시는구나. 맥주를 오랜 시간 한 곳에서 놀며 마시는 미국 학생들 음주 문화와 소주를 짧은 시간 여러 차로 나눠 옮겨 다니며 마시는 한국 학생들의 음주 문화는 달랐다. 결국 과열됐던 경쟁은 소주 종주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국위 선양은 의외로 쉬웠다. 내가 잘하는 일 하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일이 무엇이든 당당히 경쟁할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나라를 빛 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나는 술이라는 별로 자랑스러울만한 부문에서 경쟁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대한민국의 강함을 증명하기엔 충분했다. 얼마 전, 프로게이머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며 이 에피소드가 생각이 나서 글을 쓰게 되었다. 학생들 교육의 방해거리인 게임이 e-sports라는 하나의 경쟁 스포츠 장르가 되리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그리고 대한민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프로 게이머로서 세계 무대에서 승승장구하는 모습은 너무나 자랑스럽다. 게임뿐만 아니라 먹방, 춤, 웹툰 등의 서브컬처가 세계적으로 대한민국을 알리는 마케팅 역할을 하고 있다.


비록 내가 선택한 길이 지금 이 순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좁고 험난한 길 일지라도 묵묵히 걸어 나간다면 광활한 대지가 펼쳐질 수 있다. 미운 오리 새끼는 결국 아름다운 백조로 성장했다. 수 없는 반대와 조롱 속에서 애플을 성장시킨 스티브 잡스는 말했다.

"당신의 시간은 제한적이므로, 다른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도그마에 갇혀 살지 마세요. 즉, 다른 사람의 생각 결과에 따라 살지 마세요.”


*비어퐁: 탁구대 혹은 테이블 위에 맥주를 반쯤 채운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볼링핀 배열로 양방향에 배치하고 상대팀의 컵 안에 탁구공을 넣어서 상대팀에게 맥주를 마시게 하는 게임.


*샷건: 맥주 캔의 옆 부분을 자동차 키, 집 키 등으로 뚫음과 동시에 캔을 따서 공기를 통하게 하고, 열쇠로 뚫은 부분에 입을 대고 한 번에 마시는 방식.




하늘은 시끄럽게 울어대고

나는 취하고


머릿속이 시끄러워서

한 잔

더.


그리고

이젠 나의 길을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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