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나라는 개인 총기 소지를 허가하고 있다. 2018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 총기 소지율은 120%라 한다. 100명이 120 정의 총기를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ABC뉴스에서는 2023년 12월 7일 기준, 총 40,167명이 총기 사건으로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이 수치는 2023년에만 하루 평균 118명이 총기 사건, 사고로 사망했다는 거다. 수치로만 봤을 때도 엄청난 숫자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일반인들이 실제로 미국에서 총기 위협이나 총기 사고에 대해 실감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한국에서도 많은 사건 사고들을 실제로 경험하기보다는 뉴스나 여러 다른 매체를 통해서 접하는 경우가 많은 것과 같다. 그래서 나 역시도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미국의 위험성은 영화나 드라마가 일반화시킨 네거티브 이미지라고 생각했다. 우리도 한국 영화에 등장하는 수많은 깡패들과 살인마들을 쉽게 접하지는 못하지 않는가. 하지만 총기 범죄에 있어서 지역적 차이와 인종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나 관광객들의 활동 반경에는 우범 지역이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리고 미국 내 한인들의 생활 수준을 고려해 봤을 때, 인간관계에서 총기 범죄와의 관련성은 낮다. 하지만 유학생인 동시에 노동자였던 나의 활동 반경은 일반적인 유학생들과는 약간 달랐다. 내가 일 했던 옷 가게는 저가의 의류를 저소득층을 상대로 판매했다. 그러다 보니 가게의 위치가 저소득층이 많은 슬럼(Slum) 지역과 가까웠다. 손님들은 대부분 흑인, 히스패닉들이었고,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생들 또한 흑인들이 많았다. 이러한 환경적인 문제로 나는 자연스레 우범 지역에 반쯤 걸쳐져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하루는 같이 일하던 흑인 친구의 집에 초대를 받아 내 차로 함께 이동 중이었다. 그 친구는 잠시 대마초를 사야 한다며 더 들어가면 위험하니 한 블록 전에 차를 세우고 기다려 달라고 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겠냐 싶었다. 결국 나는 끝까지 고집을 부려 드러그 딜러의 집 앞에 차를 주차했다. 친구는 금방 갔다 올 테니 무슨 일 있으면 전화 하라며, 한 건물로 뛰어 올라갔다. 나는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순간 뒤에서 철컥 소리와 함께 차가운 물체가 내 귓불을 뭉개며 들어왔다. 총인 듯했다.
“나를 보지 말고, 가만히 있어.”
무겁고 차가운 말투였다. 경찰은 아니었다. 경찰이나 형사였다면, 이런 상황에 내게 보지 말라는 표현이나 가만히 있으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손을 핸들 위로 올리라고 했을 것이다. 경찰이 아니라고 판단되자 두려움이 커졌다. 나는 담배도 끄지 못한 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너 지금 여기서 뭐 해? 누구랑 왔어? 너 MS-13(라틴아메리카인들을 중심으로 한 갱이자 국제범죄조직) 이야?”
어떻게든 나를 알려야 했지만, 두려움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당시에는 MS-13이 무슨 뜻인지 조차 몰랐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그는 총구를 관자놀이에 옮겨 대고 다시 물었다.
“너 경찰이야?”
“아니야. 나 경찰 아니야. West Gate Plaza에 있는 P.C.X(옷 가게 이름) 매니저야. 원한다면 명함도 보여줄게. 같이 일하는 Marco가 대마초 사겠다고 해서 여기에 왔어. 금방 내려올 거야. 그가 내려오면 사실인 걸 알 수 있어. 아니면 Marco에게 전화할 수 있게 해 줘.”
나는 마치 흑인 래퍼가 된 듯 영어를 질러댔다. 담뱃불이 손가락 사이로 타 들어갔지만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살려는 의지가 강했던 나의 정신은 이미 육체의 한계점을 초월하게 만들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한 발 앞으로 오며 내 얼굴을 확인했다. 그는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며 말했다.
“헤이~My boss. 나 P.C.X 손님이야. 나 너 알아. 미안해. 내가 몰라봤어.”
이러던 와중 대마초를 사러 갔던 Marco가 위에서 상황을 보고 헐레벌떡 뛰어 내려왔고, 상황은 마무리 됐다. 나는 차에서 내렸고, 우리는 다 같이 웃으며 담배를 피웠다. 하지만 내 다리는 여전히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내게 총을 겨눴던 친구는 까무잡잡한 피부에 반삭발을 한 내 뒷모습이 엘살바도르인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크립스(Crips)라는 흑인 갱단의 조직원이었고, 그 거리는 크립스의 거점이었다. 당시 엘살바도르인 중심의 히스패닉계 갱단인 MS-13이 세력을 넓히던 중이었고, 그래서 오해를 한 것이었다. 그는 위험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전화 하라며, 우리에게 연락처를 주었다. 그 후 연락 할 일은 없었지만, 종종 가게를 찾는 그와 유쾌하게 웃으며 이야기하는 사이가 되었다.
또 다른 어떤 날이었다. 평일 낮 시간이어서 아르바이트 없이 혼자 가게를 보고 있었다.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흑인이 한 명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멀리서 인사를 했지만, 그는 후드 속에 얼굴을 숨긴 채 인사를 받지 않았다. 그는 구석에서 청바지를 뒤적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있었다. 먼저 와 있던 한 가족이 옷을 잔뜩 가져와 계산을 하고 나갔고, 가게에는 그 후드맨과 나만 남았다. 그는 갑자기 뒤돌아 계산대 뒤에 있는 나에게로 뚜벅뚜벅 걸어왔고,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나는 총을 보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고 그놈을 보지 않으려 애썼다.
“빌어먹을 가진 돈 전부 꺼내 놔!!”
나는 아래만 본 채로 곧바로 계산대를 열고 돈이 든 레지스터 서랍을 통째로 꺼내 테이블 위로 올렸다. 그리고 연신 말했다.
“나는 니 얼굴 못 봤어. 나는 니 얼굴 못 봤어”
그는 황급히 돈을 챙겨서 가게를 뛰쳐나갔다. 나는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그대로 숙인 채 60초를 새었다. 그리고는 바로 경찰에 신고한 후, 총괄 매니저형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 모든 행동들은 교육받은 매뉴얼 그대로 한 행동이었다. 덕분에 나는 아무런 상해도 입지 않았다. 그리고 출동한 경찰은 매장 cctv를 영상을 확인하고 돌아갔고, 경찰로부터 범인은 두 시간 만에 다른 매장에서 범행을 벌이다 현행범으로 체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런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인간은 죽음을 강요당할 때 가장 필사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웃기는 건 우리의 삶은 이미 죽음이 강제되어 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삶 전체가 필사적이어야 하지 않은가?’ 나는 총구가 두 번이나 내 머리에 겨누어졌을 때 여느 때보다 필사적이었던 것 같다. 내 한 마디의 실수나 한 순간의 판단 착오가 내 남은 수명을 수십 년에서 수 초로 단축 시킬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에 가까운 순간을 경험하면서 필사적인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고 하지 않는가. 내게 강제되어있는 시간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그 시간이 수십 년에서 언젠가는 수 초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수초가 남은 상황에서만 필사적이어야 할까? 아니, 과연 그때에 필사적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죽음은 누구에게나 강제되어 있다. 그리고 그 강제되어 있는 시간은 하루하루의 연결로 유동한다.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반복되는 업무, 가사, 일상 속에서 그저 무심코 흘러가기 쉽다.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고, 내일이 지나면, 또 다른 내일이 오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이 삶의 의미를 흐린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 연극 작가인 세네카는 말했다.
“하루하루를 일생처럼 살아라.”
이 말은 우리가 현재의 순간을 가치 있게 여기고, 매일을 소중히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에게 강제되어 있는 죽음이란 순간이 언제일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루하루가 필사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일생처럼 살아야 한다. 지금 이 순간이 나의 일생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총이 내 머리를 겨누고 있을 때 보다 더 필사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