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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이

by 징계
dd_0314_1.jpg 어쩔 수 없이 소란스러운

유학 시절, 사람들은 나에게 말했다.


“너는 내가 평생에 걸쳐 한번 경험해 볼까 말까 하는 일들을 유학생활 4개월 만에 다 한다.”


어학연수 4개월 정도 했을 때의 일이다. 어학연수를 하며 친해진 옴 닐캄행이라는 태국 친구의 생일이었다. 옴의 삼촌은 ‘Bangkok thai (방콕 타이)’라는 태국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어서 우리는 그 가게에서 영업시간 이후에 문을 닫고 술을 마셨다. 어학연수 시절이라 각국의 친구들이 많이 모였다. 나는 언제나 그렇듯 신나게 술을 마셨다. 생일 파티는 별 특이사항 없이 잘 마무리됐다. 그때 시간은 새벽 3시경이었다. 나는 취해 있었지만 달리 집에 갈 방법이 없어 운전석에 올라탔다. 중국 부자 친구가 옴의 생일이라고 사온 87년 산 보르도 와인과 나이가 똑같은 나의 87년형 뷰익을 타고 집으로 운전을 해 가는 중, 뒤에서 써치 라이트가 내 차를 비추었고, 경찰 사이렌이 울렸다. 망했다.


나는 몇 주 전에도 속도위반으로 경찰에 잡힌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영어를 못하는 척을 했더니 경찰이 귀찮다는 듯 나를 보내 줬었다. 나는 같은 방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건방진 생각 따위. 사실 영어를 정말 못하는 거였다.


차를 세우자 덩치 좋은 sheriff(보안관)이 다가왔다. 미국의 경찰은 단계 별, 행정단위 별로 나누어져 있다. 동네 경찰인 township police, 도시 경찰인 city police, 카운티 경찰인 county police와 sheriff, 주 경찰인 state police, 그 위로는 연방 정부 소속으로 FBI가 있다. 디테일하게는 더 많지만 간략하게 이런 모양새다.


“License and registration, please. (면허증과 차량등록증 제시 부탁합니다.)”


나는 내 국제면허증과 차량등록증을 떨리는 손으로 보안관에게 건넸다. 그는 술 냄새를 맡았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국제면허증을 처음 보는듯한 표정으로 나와 면허증을 번갈아 보던 경찰은 나에게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어디서 왔습니까?)”


나는 유학생 신분으로 늘 상 듣는 이 질문에 당당히 대답했다.


“I'm from Korea. (한국에서 왔습니다.)”


국제면허증을 확인 한 그는 다시 천천히 물었다.


“Where! Are! You! From? (어디서 왔습니까?)


나는 내 말을 잘 못 알아듣나 싶어서 다시 얘기했다.


“Korea! (한국!)”


그는 이번엔 신경질적으로 다시 물었다.


“Where are you coming from? (어디서 오는 거냐?)”


나는 또박또박 다시 대답했다.


“I am Korean. I am from Korea. (나는 한국인이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


“I know you came from Korea. I mean, where did you drink? (나는 네가 한국에서 온 걸 안다. 어디서 술을 마셨냐?)”


이제야 제대로 알아들은 나는 대답했다.


“Bankok, Thai. (태국, 방콕)”


그땐 왜 그랬나 모르겠다. 참 당당했다. 아마도 영어를 못해서 그랬을 거다. 말귀 못 알아들어 끊임없이 한국에서 왔다고 하더니, 술을 어디서 마셨냐니까 태국 방콕에서 마셨단다.


“Step out of the car! (차에서 내려라!)”


그 길로 나는 보안관 차를 타고 경찰서로 끌려갔다.


영어를 잘하던지 아니면 술을 마시지 말던지. 물론 영어를 잘했었던 들 내 음주운전에 대한 죄가 무마되는 것은 아니다. 당시는 스마트폰도 우버도 없던 시절이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는 타지 생활이라는 허울 좋은 핑계의 나태하고 무책임한 행동이었을 뿐이다. 우린 흔히들 ‘어쩔 수 없이’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차를 놓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늦었다.”, “너무 피곤해서 어쩔 수 없이 과제를 못했다.”, “내 것을 챙겨 오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네 것을 잠깐 빌려 썼다.” 예를 들자면 무수히 많은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중 정말 어쩔 수 없는 상황은 몇이나 될까? 내가 조금만 일찍 나왔더라면, 내가 조금만 일찍 잤더라면, 내가 조금만 신경 써서 물건을 챙겼더라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나태했던 것이고, 내가 무책임한 것이다.


예전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슈퍼주니어의 이특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은 제가 어제 다른 스케줄 때문에 한숨도 자지 못하고 오늘 녹화에 나왔어요. 하지만 시청자들은 제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기 때문에 오늘 제가 이 방송에서 티를 낼 수가 없어요.”


그의 그 한 마디와 방송에서의 태도는 내 마음에 회초리가 되었다. 내 실수와 과오를 어쩔 수 없었다는 졸렬한 핑계 뒤에 숨어 살았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수많은 어쩔 수 없는 상황들 속에 놓여 있다. 이제부터라도 책임감으로 이를 하나씩 접어 나가야겠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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