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안관 사무실로 나를 끌고 간 나이 지긋한 보안관은 내 양 손목에 채워져 있던 수갑 한쪽을 풀러 사무실 철제 벤치 다리에 채웠다. 그리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했다. 정확한 내용은 당연히 내 짧은 영어 실력으로는 알 수 없었다. 한국에서 왔다는 말과 영어를 잘 못한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나중에 조서 내용에서 알게 된 건데 영어를 잘 못한다고 얘기한 게 아니고 술에 취해 말도 제대로 못 한다고 얘기했던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술기운이 남아있던 나는 보안관 사무실에 수갑 채워져 있는 내 모습이 마치 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설렘도 있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사무실 입구로 두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위협적인 네이비 색 정복을 입은 뉴욕 주 경찰이었다. 뭐지? 설마 나 때문에 온 건가? 보잘것없고 하찮은 나 따위의 음주운전 사건으로 주 경찰까지 등장할 줄이야.
덩치가 산만한 둘이 내 앞에 딱 서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You Jae Hoon Choi?”
맞다고 대답하자 벤치에 채워져 있던 수갑을 보안관에게 풀어 달라고 하더니 나를 데리고 짙은 네이비 색의 주 경찰차에 태웠다. 무서웠다. 겁이 났다. 정말 이때부터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영화 속 주인공? 그 허세 풍만한 설렘은 단지 술기운 때문이었다. 익숙지 않은 길인 데다 새벽길이어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30여분을 달렸을까? 묵직하고 갑갑하게 생긴 건물 앞 주차장에 차를 멈추었다. 옆에는 경찰차들이 줄지어 주차되어 있었다. 경찰서인가? 이들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들에게 영어로 뭘 어떻게 물어봐야 될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언어 장애와 청각 장애가 있는 장애우가 된 느낌이었다. 너무나도 답답했다. 나는 계단을 걸어 지하로 끌려갔다. 뭔가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왔다. 분명히 싸우는 소리다. 미국은 욕이 정말 심플하다. FUCK 하나로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 그 심플하고 시끄러운 욕설이 들려오는 곳에 도착했다.
유치장이었다. 영화에서만 보던 오렌지색 죄수복을 입은 흑인들과 스페니쉬들이 잔뜩 성난 얼굴로 철창을 붙잡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소리를 지르는 건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왜 소리들을 지르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 소란을 중재하는 경찰도 없었다. 경찰들은 너희 일은 너희들끼리 알아서 해결해라 라는 표정이었다. 내 머릿속에 가득 찬 공포심이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전해졌다. 피가 차가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에서도 유치장에 수감되었던 경험이 있었지만 여기는 미국이다. 이는 전혀 다른 공포감이었다. 나를 데리고 온 경찰은 탈의실 같은 곳에서 내 소지품을 모두 털어갔다. 그리고 말 그대로 온몸을 검색했다.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숨길 수 있는 신체 부위까지도.
그리곤 나를 끌고 복도 제일 끝으로 가서 철창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나처럼 사복을 입은 백인 노인이 앉아 있었다. 오른쪽 소매와 가슴 쪽에 피가 묻어 있었다. 다행히도 이 노인은 나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나를 데려온 경찰에게 뭐라 한 차례 고함을 치더니 자리에 털썩 앉아 계속 혼자 중얼거렸다. 다행인 듯했지만 사실 피 묻은 노인이 내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중얼거리는 모습은 굉장히 괴기스럽다. 나는 최대한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거리와 각도를 정확히 계산하고 그곳에 쥐 죽은 듯이 앉아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른 수감실에선 계속 욕설과 괴성이 들려왔다. 1시간이 10년 같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교통사고를 당하는 찰나 지나온 인생이 필름처럼 지나간다고. 나는 그 유치장 안에 있는 두 시간 동안 지나온 인생부터 앞으로 펼쳐질 인생까지 춥고 좁은 극장에서 아주 길고 긴 시간 동안 관람하는 느낌이었다.
돌이켜 보면 두려움 없이 살아온 인생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나는 풍족하진 않았지만 든든한 가족 품에서 풍파로부터 보호받으며 자랐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나름대로의 울타리를 만들고, 그 울타리 안 세상을 함께 싸우며 지켜 나갔었다. 함께였기에 겁나는 것이 없는 나였다. 그런 가족과 친구들이 없는 울타리 밖의 나는 한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였다. 그들이 없는 세상 속 나는 차가운 철창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구석에 숨어 숨 죽인 채 앉아 있는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 생각들이 스쳐간 그날 이후, 나는 겸손과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든지 혼자가 될 수 있고, 우리를 지켜주던 울타리를 벗어나는 날이 올 수 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가족이 있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이룬 모든 일들은 친구들이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를 알고 겸손하자. 이를 알고 그들을 소중히 하자. 그리고 스스로 강해지도록 노력하자. 그리하여 내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