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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커피 그리고 술

by 징계
dd_0276_1.jpg 질량 보존의 법칙

미국에서 유학을 하던 시절,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 실패와 사기 피해로 집안은 급격히 어려워졌다. 나는 학업에 투자하는 시간의 비중을 줄이고, 아르바이트의 비중을 늘려야 했다. 고단은 두 번째 문제였다. 이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내가 학업을 이어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나는 비자 상 유학생 신분이어서 일을 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한국인이 운영하는 옷 가게에서 불법적이지만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한국인 매니저형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려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그는 흔쾌히 스케줄을 늘려주었고, 주급도 올려주었다. 도움의 손길이 너무도 따듯했다.


하지만, 나의 하루 일과는 그 따뜻함과는 다르게 살인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끼니도 챙기지 못한 채, 커피 한 잔 달랑 들고 학교를 향했다. 수업 전에 미술 과제를 하고, 오전 강의를 들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맥도널드 드라이브 쓰루에서 음료 하나 없이 달러 메뉴 햄버거 하나로 이동 간 식사를 하며 아르바이트하는 가게에 갔다. 가게에 들러 잠시 일을 보고, 다시 학교로 가서 오후 수업을 들었다. 오후 수업이 끝나면, 다시 가게로 가서 9시까지 일을 하고, 매출 정산을 했다. 미대에서 사진을 전공한 나는 이렇게 아르바이트 일이 끝나고 밤에 다시 학교로 가서 새벽까지 필름 현상과 인화를 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저녁식사는 이때 학교 자판기에서 프레첼 과자와 커피로 때웠다. 주말에 일을 할 때에나 사진 과제를 위해 로케이션 촬영을 나갈 때에는 밥값을 아끼기 위해 하루 종일 1.5L 우유 한 통으로 버티곤 했다.


이런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커피는 필수가 되었다. 식비를 아끼기 위해 끼니 대신 커피를 마시는 일도 부지기수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카페인에 예민한 나는 밤에 잠을 자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낮에는 커피로 잠을 깨우고 밤에는 술로 잠을 재웠다.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자기 파괴주의적 생활이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몸은 엉망이 되었고,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당시 같이 살던 룸메이트 형이 얘기했다.


“몸 생각해서 잘 챙겨 먹어. 밥값 5천 원 아끼려 다가 병원비로 5천만 원 나가는 수가 있어.”


때론 억울할 때도 많았다. 나를 제외한 모든 유학생들이 부유한 것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BMW, 아우디, 벤츠를 타고 다녔다. 에어컨도 안 나오는 1000달러짜리 87년형 뷰익을 타고 다니는 유학생은 나 밖에 없었다.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서 일을 하는 유학생은 나 혼자인 것처럼 느껴졌다. 다들 블랙 프라이데이가 되면 아웃렛으로 쇼핑을 하러 갔지만, 나는 가게에서 일을 해야 했다. 크리스마스엔 가게에서 옷을 팔며 연인들이 손잡고 쇼핑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만 했다. 왜 나만 아껴 써야 하고, 왜 나만 놀 시간이 없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이젠 그만 놀고 열심히 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나는 놀만큼 놀았던 것 같다. 중, 고등학교 시절 지지리도 공부를 멀리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만 했다.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생활 기록부에 적힌 내 결과(수업에 빠진 횟수. 결석은 일 단위, 결과는 과목 단위이다.) 수는 367교시였다. 학교보다 오락실, 노래방, 사우나, 그리고 pc 방을 더 많이 갔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거늘, 자기의 본분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았다. 억울할 것도 분할 것도 없었다.


억울하고 분했던 그 시절 옷 가게에서의 경험은 내가 패션 사진을 촬영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남들보다 빠르게 옷을 다루고, 의상 코디를 원활하게 함으로써 클라이언트의 만족도를 높일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빠르게 승진했고, 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일찍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어느덧 40년을 넘게 살다 보니 고난의 의미가 삶 속에 고르게 분배되어 감으로 느껴진다. 나는 아직도 낮에 커피를 마시면 잠을 못 잔다. 그래서 나는 커피를 안 마신다. 그리고 나는 이제 술을 안 마셔도 잠을 잘 잔다. 그래도 나는 술을 마신다. 고르게 잘 살고 있다. 인생이란, 질량 보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물리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바람 소리에

눈을 떴더니

술잔 앞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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