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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시즈 마 송

by 징계
tm_0187_1.jpg 테이스트

2018년 트렌드에 소확행이라는 단어가 선정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미국에서 돈 없는 내 신세를 한탄하며 의류 매장 아르바이트를 막 시작했을 즈음, 내가 일하는 가게로 30대 중반의 한 흑인 남자가 풋락커(신발 가게)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는 내게 목적이 확실하다는 표정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는 쇼핑백에서 나이키 운동화를 꺼내 카운터 위에 올리며, 나에게 옷 한 벌을 이 신발과 매치 시켜달라고 했다. 나는 미술 전공을 살려 기가 막히게 어울리는 색의 옷 한 벌을 골라서 보여줬다. 그는 맘에 들었는지 한껏 격앙된 말투로 내게 얼마냐고 물었다. 나는 세금까지 포함해서 친절히 가격을 얘기해 줬다. 그는 가격을 듣더니 기쁨의 욕설을 써가며 말했다.


“매주 클럽에 오는 빌어먹을 가난한 흑인 놈들이 어떻게 전부 후레쉬 한 새 옷을 입고 오는지 이제야 알았네! 여기는 이제부터 완전 씨발 내 가게다!”


그리고 그는 내게 팁으로 10불을 주고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를 나섰다. 당시 환율로 내가 일하던 가게의 단가는 대략적으로 반바지 $4.99(6,000원), 청바지 $9.99(12,000원), 티셔츠 $7.99(10,000원) 정도였다. 물론 이보다 조금은 더 가격이 나가는 옷들도 있었지만 저렴한 옷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손님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니 나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매주 클럽에 새 옷을 입고 갈 자신을 상상하며 기뻐하는 모습이 너무도 귀여웠다. 그리고 그 기쁨이 뒷모습에서도 느껴졌다. 이후에도 그는 종종 가게에 와서 옷을 한 벌씩 사갔고, 그럴 때마다 클럽에서 여자와 만난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는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매일 사서 노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에게 우리 가게는 찰리의 초콜릿 공장인 것이다.


또 다른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와 엄마 그리고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두 아들, 이렇게 네 명의 흑인 가족이 가게에 들어왔다. 들어오면서부터 할머니는 두 손자를 혼내고 있었다. 엄마는 신경도 안 쓴다는 듯이 쇼핑을 시작했다. 나는 할머니 목소리가 너무 커서 다른 손님들 쇼핑에 방해가 될 것 같았다. 재빠르게 할머니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그랬더니 언제 화를 냈냐는 듯이 방긋 웃으며 내게 인사를 했다. 그러더니 이 가게는 음악이 맘에 든다면서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음악이 바뀌었고, 그 흑인 할머니의 눈빛이 반짝였다.


“디시즈 마 쏭!(This is my song!)”


할머니는 이 한마디를 외치더니 그렇게 혼을 내던 손자들 손을 잡고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다른 손님들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좋아하는 음악에 정신 줄을 엮어 버렸다. 그러자 다른 한 흑인 남자 손님이 ”나랑 취향이 같네요. 아주 좋은 음악적 소양을 갖추셨어요.“라고 하더니 그 역시 춤을 추는 것이었다.

이 무슨 난장판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의 표정을 봤다.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이었다. 음악 하나에 대동단결하고 옷 가게를 한순간에 클럽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화를 잊은 채 행복에 취했다. 한국이었고, 한국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니 굳이 그렇게 생각할 필요도 없이 나였다면 어땠을까?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느라 어깨춤이라도 출 수 있었을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이런 게 소확행이 아닌가 싶다.


소확행이라는 단어는 1986년에 ‘랑게르한스섬의 오후’라는 에세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사용한 단어라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확행을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잔뜩 쌓여 있는 것, 새로 산 정결한 면 냄새가 풍기는 하얀 셔츠를 머리부터 뒤집어쓸 때의 기분.’이라고 정의했다. 참 정적이고 고요한 동양의 미풍양속이 느껴지는 소확행이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내가 만난 이들의 소확행은 발산하고 전이되는 굉장히 움직임이 큰 그 무엇이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낀 그들은 행복의 에너지를 발산했다. 그들의 에너지로 인해 내 마음 역시 동했다.


손님들과의 이런 작은 에피소드들이 쌓여가면서 나 역시 소소한 일에 대한 고마움과 즐거움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나의 즐거움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던 내 성격은 조금씩이나마 외향적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미국 생활이 훨씬 수월해졌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이유로 쭈뼛쭈뼛 말도 잘 못하던 나는, ‘좀 못하면 어때? 웃고 즐기면 되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아주 소소한 일에도 흥얼거리며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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