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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공자

by 징계
ps_0572_1.jpg 여정, 그리고 평가

나는 학창 시절 꿈이 애니메이터였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중학교 2학년때부터 잠깐 만화를 그렸다. 미술 학원을 따로 다니지는 않았지만, 꽤나 실력이 있어 친구들이 내 연작 만화를 기다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 학업에 충실하지 않은 채 낙서만 하는 아이는 선생님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나는 수업시간에 낙서를 한다는 이유로 늘 상 혼나곤 했다. 심지어 미술 시간에도 왜 그림을 만화처럼 그리냐 고 타박을 받았다. 나는 점차 만화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게 되었다. 엄마는 그런 나를 타이르며 말했다.

“너 미술 제대로 해서 홍대 가라. 홍대 가면 딱 너 같은 애들 많이 모여있어. 놀기 좋아. 그러니까 미술학원에서 입시 미술 공부하고 홍대 가라. ”


엄마는 놀기 좋다는 떡밥으로 나를 어떻게든 대학 입시 궤도에 진입시키려 했다. 하지만 그때는 미래나 장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기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에 바빴다. 그래서 나는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


“엄마, 나 공부로 쇼부(승부) 볼게!!”


노력과 수고가 필요한 길을 피했던 것이다. 결국 공부도 미술도 제대로 못한 나는 입학 실기가 없었던 신구 전문대 산업 디자인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 생활은 나름 재미있었고, 전공 수업도 적성에 맞았지만, 20살의 나는 여전히 철딱서니가 없었다. 1학년 1학기 성적은 그럭저럭 나왔지만, 1학년 2학기 성적은 0.0이 나왔다. 심지어 입영통지서가 나와서 군 휴학을 하고는 게임에 미쳐 입대 날짜마저도 연기해 버렸다. 나는 그 당시 리니지(온라인 게임)에 빠져있었다. 그렇게 나는 1년 동안 친구들과 게임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나는 경험 우선주의자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시간도 허송세월이 될 수 없다는 주의다. 내가 보낸 모든 시간은 경험이 되어 내게 내재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입대 전 1년의 시간만큼은 정말 아무짝에 쓸모없는 시간과 경험이었다. 그저 내가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나 자신에 대한 도피 생활이었다. 도피 생활은 군입대라는 국민의 의무로 마무리 짓게 되었다. 만약 국방의 의무가 없었다면 나는 더욱 오랜 방황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때론 강제적인 인생의 전환점도 필요하다.


제대 후, 나는 일본으로 가서 애니메이션 공부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나가 미국에서 먼저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고, 두배로 나갈 집세와 생활비를 아끼려는 이유로 나는 누나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대학 진학을 위해 어학연수가 끝날 무렵, 토플 시험을 봤다. 역시나 토플 점수는 낮게 나왔다. 그래도 내가 유학하던 지역에는 애니메이션 전공이 있는 대학교가 없다는 허울 좋은 핑계가 있었다. 학교와 전공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는 순수 미술 전공으로 Hudson Valley Community College에 입학을 하게 된다. 나는 그저 그렇게 또 노력 없이 흘러 들어간 것이다.


그래도 미국 대학에서 유화, 펜 드로잉, 조각, 실크 스크린 등의 여러 미술 기법들을 배우는 일은 나름 흥미로웠다. 그중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사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사진이라기보다는 사진기와 암실이 좋았다. 사진기는 다른 미술 기법과는 다르게 개인의 기술력 없이 결과물이 만들어져 나왔다. 그리고 암실이 좋은 이유는 같이 공부하는 미국 친구들과 어두움에 의해 분리되어 영어라는 부담의 잔을 나눌 필요가 없어서였다. 이 글을 쓰면서 느끼지만, 정말 게으르고 초라한 이유로 사진을 좋아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었다. 내가 사진을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칭찬이었다. Hudson Valley Community College 1학년 시절, 나를 Korean Photographer라고 부르는 교수님이 계셨다. 다른 학생들은 이름을 불렀지만, 유독 나만은 Korean Photographer라 부르셨다. 처음엔 내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서 그런가 했다. 하지만 나는 미국에서 Jay라는 이름을 썼고, 그 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울 일은 만무했다. 그는 잘 관리된 80년식 하얀색 레인지로버를 타시는 연세가 60세에 가까운 노신사 셨다. 교수님은 젠틀함 속에 터프함을 겸비하고, 중후하지만 위트가 있었기에 많은 학생들이 존경하며 따랐다.


학생 신분에 포토그래퍼라는 타이틀로 불리는 것은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마치 나에게 끊임없이 사진계로 들어오라는 유혹의 목소리 같았다. 그리고 입시 위주의 학업이라는 과정 속에서는 칭찬을 들어본 적 없던 나에게 의미가 담긴 칭찬들을 해 주셨다. 물론 잘했어, 수고했어 같은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칭찬은 들어봤겠지만, 내가 만든 어떤 결과물에 대한 과정에 대해 알려하고, 그 과정을 이해한 사람에게 듣는 칭찬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사진 수업을 듣는 유일한 동양인이어서 더욱 신경을 써 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니었다. 교수님은 동양의 문화, 한국의 문화를 내게 먼저 묻고 이해하려 했다. 그것을 토대로 내가 왜 미국의 특징적인 피사체에 관심을 가지는지 분석하고, 촬영 방향을 제시해 주셨다. 이후의 작업물에 대해서는 포괄적이 아닌 구체적인 칭찬을 해 주셨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도 나는 그 수업을 듣는 친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이 한 분의 관심과 칭찬이 내 인생의 길라잡이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너무나도 평범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누군가가 아닌 사고뭉치 문제아였던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일이었던 것이다. 공부 이외의 것은 중요하지 않은 사회에 속해 있던 나. 공부를 열심히 안 한다는 이유로 관심 밖에 존재했던 나. 관심을 갈구하는 아우성이 사고를 일으키고, 사고를 일으키고 다닌다는 이유로 기피 대상이었던 나. 이런 이유로 잘하는 일조차 눈에 띄지 않았던 나. 그런 내게 그가 던진 의미 있는 호칭과 관심 어린 칭찬은 인생이라는 항로의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나는 더 많은 칭찬을 갈구하며, 더욱 노력하는 사람이 되어갔다.


내가 사진을 선택하고, 아직까지 사진을 하고 있는 이유는 그분에 대한 감사 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직도 관심을 갈구하는 치기 어린 마음 일 수도 있다. 나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때 그분이 인정한 Korean photographer는 현재 사진이란 직무를 묵묵히 수행하며 끊임없이 칭찬을 받고 있다. 정말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학교에 적응 못하던 아인슈타인을 천재물리학자로 만들 수 있었던 계기도 어머니의 격려와 칭찬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쫓겨난 에디슨을 발명왕으로 만든 것도 어머니의 믿음과 칭찬이었다. 고래의 춤을 보지 못한 나는 역사를 믿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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