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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빈 대장

by 징계
hb_0590_1.jpg 아래, 동심

사람들은 각자가 가진 이미지가 있다. 그중에는 특별한 이미지를 가진 사람들도 있다. 이슬만 먹고살 것 같은 여자 연예인, 화장실도 갈 것 같지 않은 남자 연예인, 지식이 하해와 같을 것 같은 학자, 패배를 모를 것 같은 운동선수. 내가 받은 등반가 김홍빈 대장의 첫인상은 ‘산이 굴복시킬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히말라야의 별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김홍빈 대장은 2021년 7월 17일 코로나19로 지쳐있는 국민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주기 위해 히말라야 산맥 해발 8047m 높이의 브로드피크로 향했다. 김홍빈 대장은 출발 18시간 만인 18일 4시 58분 파키스탄령 카슈미르 북동부 가라코람 산맥 제3 고봉인 브로드피크 등정에 성공했다. 장애인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완등 소식을 전한 후 김홍빈 대장은 하산을 시작했다. 동행한 하이포터(전문 짐꾼, 파키스탄에서는 셰르파를 하이포터라 부름) 4명은 먼저 내려왔지만 김홍빈 대장은 내려오지 않았다. 히말라야는 등산보다 하산이 위험해서 대원들끼리 줄을 묶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줄을 묶을 시 한 명이 떨어지면 나머지 4명이 잡을 수 없고 더 많은 사고가 나기 때문에 하산 시에는 개별적으로 내려온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김홍빈 대장은 하산 중 해발 7900m 지점 크레바스(빙벽 갈라진 틈)에 떨어져 조난을 당했다. 그는 위성 전화로 구조 요청을 했고, 러시아 구조대가 출동해 김홍빈 대장을 발견했다. 하지만 구조 과정에서 얼어있던 줄이 끊어지면서 김홍빈 대장은 영원히 산의 품에 안겼다.


내가 김홍빈 대장을 만난 건 2014년 트렉스타라는 아웃도어 브랜드 광고 촬영 때였다. 알베르토 이뉴라테기(1992년 당시 23살의 최연소 나이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무산소 완등한 스페인의 등반가)와 김홍빈 대장이 모델이었다. 등산이나 등반에는 문외한이었던 나는 김홍빈 대장을 만났을 때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열 손가락이 모두 없었기 때문이다. 1991년 북미 최고봉인 맥킨리 단독 등반 중 조난을 당해 열 손가락을 모두 산에 묻고도 수십 년간 계속 산에 오르셨다고 한다. 촬영을 업으로 삼고 장비를 다루는 내 입장에서 가능성 여부 자체가 의심스러웠다. 하다못해 서울 근교로 캠핑을 가더라도 텐트를 치려면 손가락 없이 가능할까? 장비를 운반하는 것조차 불가능할 것 같았다. 물론 팀으로 움직이고 각자의 역할이 있겠지만 나 같은 일반인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장애에 굴하지 않는 삶을 넘어서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그저 존경스러울 뿐이었다.


우리 촬영 스태프들은 범상치 않은 그의 삶의 이야기와 자연과의 싸움을 통해 묻어있는 그의 품행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를 얄팍한 속임수로 눈 덮인 산 정상 세트를 만들어 놓은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기가 죄송스러울 정도였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이야기와 애티튜드를 사진에 그대로 담으려 노력했다. 첫 번째 착장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두 번째 착장 촬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홍빈 대장은 모자 착용을 거부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패션 촬영에서 제품을 소개하기 위한 착장은 매우 중요하다. 제품을 디자인 한 패션 디자이너를 포함해 많은 스태프들의 숙고 끝에 만들어지는 광고 촬영 착장은 그 시즌 매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단호했다. 마치 산을 바라보며 내 앞에 무릎을 꿇으라는 듯했다. 그 기세에 눌려 클라이언트는 그의 의견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과는 약간의 어긋난 부분이 있었지만 촬영은 무사히 마무리 됐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스태프들과 클라이언트들은 결과물에 흡족해했다.


마지막으로 등반가 두 분에게 고생하셨다는 인사와 함께 건승을 기원하는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김홍빈 대장은 내게 촬영보다 등반이 쉽다며 너스레 웃음을 보이셨다. 그 마지막 웃음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촬영 때 보였던 강인하고 강직한 모습과는 또 다른 너무도 푸근한 모습이었다. 산을 닮은 사람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가 너무도 산을 닮았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산이 그를 질투해서였을까? 어쩌면 그를 진정한 산으로 오해해서이지 않았을까? 산은 결국 그를 데리고 가고야 말았다.


안타까운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정부가 김홍빈 대장의 구조에 든 헬기 비용을 내놓으라며 김홍빈 원정대와 광주시산악연맹에 구조 비용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정부는 6800만 원을 청구했고, 1심은 광주시산악연맹에 2,508만 원, 동행한 대원 5명에게 1,075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구조 비행을 앞두고 주 파키스탄 대한민국대사관 소속 직원이 연맹에 구조 비용 부담에 대해 안내를 했으므로, 지급보증 약정이 되었다고 본 것이다. 원고 일부 승소 판결에도 정부는 항소를 제기했다. 구조 비용 전부를 받아내겠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청구 금액의 60% 수준으로 화해 권고를 제안했지만, 원·피고 모두 부정적인 뜻을 밝혔다. 나는 이 구상권 청구 소송에 대해서 더 이상 찾아보거나 관심을 두지 않기로 했다. 김홍빈 대장의 국위 선양에 대한 정부의 몰상식이 문제인지 광주시산악연맹과 원정대 본인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 회피가 문제인지 또는 후원사들의 발 빼기식 모르쇠가 문제인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푸근한 모습으로 미소 지으며 떠나려 했던 김홍빈 대장은 이 다툼을 바라보며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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