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직전 미국 시카고에 있는 고모네로 유학을 갔었다. 시카고에 있는 동갑내기 사촌 형의 여름방학에 맞춘 8주간의 유학이었다. 4주간의 액티비티 캠프와 4주간의 랭귀지 프로그램을 계획했다. 와이프와 나는 아들이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어린 나이지만 나름 자립심이 강한 아이였기에 별 걱정 없이 친할머니와 함께 미국을 경험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도 잘할 수 있다며 씩씩한 모습을 보였던 아들이 출국 게이트 앞에서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아들이 더 힘들어할까 끝내 참아야만 했다. 그렇게 아들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결국 눈물을 흘렸다.
40년을 훌쩍 넘게 살아온 나에게 8주라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일 수 있다. 하지만 고작 9년을 산 아들에게 부모 없는 8주라는 시간은 꽤나 긴 시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으로 하루를 보내고 미국에 잘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들은 사촌 형을 만난 기쁨에 꽤나 들떠 있었다. 나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역시나 아이들은 또래 친구들과의 시간이 진통제 역할을 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확히 3일째 되던 날, 미국 시간으로 저녁 8시쯤 아들에게 전화가 왔다. 울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다며 한국에 오고 싶다고 했다. 가슴이 먹먹했다. 단순히 그리움이 원인이었던 터라 내가 딱히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저 영상 통화를 자주 하자는 말 밖에는.
며칠이 지났지만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적응을 하면 괜찮아지겠지 했던 생각과는 달랐다. 아들에게 있어서 미국이란 곳은 생활의 변화가 너무도 컸다. 특히 언어 문제에 있어서 미국의 캠프 생활은 아들에게 큰 소외감을 느끼게 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 소외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삶의 가장 큰 의지였던 부모의 부재는 오히려 소외감을 증폭시켰다. 할머니와 고모, 사촌형에게서 느끼는 감정과 부모에게서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달랐던 것이다.
이 진통이 아들에게만 온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어린 아들이 안쓰럽다는 감정적 쓰라림뿐이 아닌, 나 역시도 삶의 변화에 대한 진통을 겪고 있었다. 9년이란 시간을 항상 함께 했던 아들을 미국이란 곳으로 보낸 후의 생활은 너무도 달랐다. 마치 오랜 친구를 떠나보낸 느낌이었다. 같이 자전거를 타던, 또 같이 복싱을 하던, 그리고 함께 밥을 먹고, 같이 TV를 보며 웃고 떠들던 친구의 부재는 내 삶의 시간도 소리도 공기마저도 바꾸어 놓았다. 문득 부모님이 떠올랐다. 아들을 군대에 2년 2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보내야 했던, 그리고 두 자식을 모두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또다시 딸자식을 미국으로 시집까지 보내야 했던 부모님. 상실감이 꽤나 크셨을 것이다. 그땐 몰랐다. 큰 진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육아의 본질은 아이들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자립을 돕는 것이라고 한다. 결론적인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부모 또한 자식으로부터 자립할 수 있는 내구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는 나를 군대에 보내고 그리움과 걱정을 잊기 위해 성경을 필사하셨다. 그리고 미국에 유학을 보내셨을 때는 성경을 영문으로 다시 필사하셨다. 종교에 의지해서 진통을 견디신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이 유학하던 시절 대장암을 앓으셨지만, 자식들 공부에 방해가 될까 완치되실 때까지 숨기셨다. 본인이 가장 의지하고 싶으셨을 순간을 인내하신 것이다.
부모들도 자식들과 함께 자란다. 그리고 어른들도 아이들과 다르지 않게 성장통을 겪는다. 우리는 이 진통을 피할 수 없다. 단지 어른인 만큼 조금은 성숙한 대처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의 부모이다. 그리고 부모 자식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떠한 형태로든 헤어짐이 있다. 때론 짧게, 때론 길게, 그리고 언젠간 영원히. 우리가 자립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먼저 챙기는 것이 누군가를 자립시킬 수 있는 시작점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자립을 교육하는 것이 헤어짐을 준비하는 성숙한 자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