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름의 깊이가 짙은 늦은 봄이었다. 오전 기온도 계절의 온기를 느낄 수 있을 정도여서 오랜만에 아침 운동을 나갔다. 조깅을 하다가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 들러 철봉을 하려는데, 철봉 옆 구름사다리 기둥에 적혀있는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떨어지면 다시 시작하기’. 꼬불꼬불 미숙한 글씨체였다.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이 쓴 듯했다. 실패의 순간에 마음속 다짐을 이렇게 간결하고 명료한 글로 새기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그 꼬마의 모습을 멍하니 서서 상상해 보았다. 떨어지고 떨어져도 다시 올라 작은 두 손에 힘을 꼬옥 주고 한 손 한 손 구름사다리를 건너는 모습을 떠올리며, 참 멋진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웃음을 머금은 채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에 나는 아들도 이렇듯 포기를 모르는 멋진 녀석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아들의 5번째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는 아들 선물로 스케이트보드를 준비했다. 나도 소싯적 스케이트보드나 인라인 스케이트 같은 스트리트 스포츠를 즐겼던 터라 균형 감각도 가르칠 겸 준비한 선물이었다. 아들 생일 당일에 친구 가족과 서울 근교 리조트로 생일 파티 겸 주말 나들이를 갈 계획이었기에 전날 짐을 싸고, 생일 선물을 포장하고 있었다. 문득 구름사다리의 낙서가 떠올랐다. 곧바로 나는 책상 서랍에서 엽서 한 장을 꺼내어 아들에게 생일 엽서를 쓰기 시작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면 돼. 포기하지 말고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 때론 힘들고 지칠 때도 있겠지만 그 순간순간들이 너에게 지혜가 되고,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너의 체력이 되고, 실패를 두려워 않는 용기가 너의 마음이 되어 누구보다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어. 사랑해, 아들. 생일 축하해.’
글을 쓰고는 혼자 피식 웃었다. 다섯 살이었다. 한글을 일찍 깨쳐서 글은 읽을 줄 알았지만 당연히 이해 못 할 글이었다. 그래도 나는 믿었다. 글의 내용을 100% 다 이해는 못하더라도 아빠의 마음은 100% 전달될 것이라고.
나는 그 후 수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아들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달고 산다. 고맙게도 아들은 그 말을 잘 따라주고 있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도 되뇌어 말한다. 포기하지 말라고. 나 역시도 사소한 어려움에 포기하고 돌아섰던 기억들이 무수히 많다. 삶의 깊이감에 도달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 무수한 포기들을 나는 답습하고 싶지 않다. 운동을 하다 보면 사점(Dead point)이라는 표현을 자주 듣는다. 이는 장거리 달리기나 등산 등을 할 때,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터질 듯 한 순간을 말한다. 심할 경우 두통과 현기증까지 동반하며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어 주저앉아 포기하고 싶은 상태가 된다. 사점을 넘기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이 사점을 넘기게 되면 오히려 평안 해지며 쾌감을 느끼게 된다. 격렬한 운동과 신체 기능이 평형 상태가 성립되는 시점으로, 이를 평안점(Comfort point) 또는 세컨드 윈드(Second wind)라고 한다. 이 순간 신체 기능은 성장을 하게 되어, 이후에는 사점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로써 그 운동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삶에도 이런 사점과 평안점은 존재한다. 포기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우리는 인생의 사점을 넘어설 수 있다.
놀이터의 그 짧은 낙서 글귀가 우리 부자에겐 아주 큰 선물이 되어 주었다. 명언은 위인이나 명사가 남긴 말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나를 움직인 문장들’에서 오하림 작가님은 드라마, 예능, 광고, 심지어는 개인의 부고, 그리고 어느 신입사원의 사직서에서도 인생에 자극이 되는 문장들을 찾아냈다. 주위를 둘러보라. 나에게 선물이 되어 줄 문장들로 넘쳐나는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