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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징계 Oct 17. 2024

몽당연필

향기 짙은

어린 시절, 짝사랑하던 소녀가 있었다.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3학년부터 6학년까지 꽤나 오랜 시간을 바라봤던 것 같다. 작고 아담했던 그녀는 마치 내 필통 속 몽당연필 같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마음의 편지를 써 온 4년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닳고 닳아 자그마해진 몽당연필. 아직 이루지 못했기에 버릴 수 없는 몽당연필. 


그녀는 달리기를 무척이나 잘해 6학년이 돼서는 학교 대표로 서울시 육상 대회에 나가곤 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꾀를 냈다. ‘나도 그녀랑 같이 서울시 육상 대회에 나가서, 1등을 놓치고 속상해하는 그녀를 위로해 줘야지. 그리고 내가 보란 듯이 우승해서 금메달을 그녀 목에 걸어줘야지.’ 마지막 멘트까지 정해 놨었다. “너를 위해 달렸어. 넌 내게 항상 1등이야.” 이 얼마나 아름답고 스펙터클하고 지금 생각하면 낯 뜨겁고 부끄러우면서도 뭔가 몽글몽글한 사랑 이야기란 말인가? 나도 운동신경이 꽤나 좋았던지라 갑자기 자신감이 생겼다. 좋은 계획이었다. 교내 육상 대표 선발전이 다가왔다. 그런데 100m 단거리에는 막강한 친구들이 많았다. 그래서 경쟁률이 좀 낮은 1200m 오래 달리기로 종목을 정했다. 이것 역시 좋은 계획이었다. 선발전 당일, 100m 선발전이 먼저 있었고, 그녀는 당당히 1등으로 골 지점에 들어와 교내 대표가 되었다. 좋았다. 나만 1등 하면 계획대로 될 것이다. 


“탕~!”


남자 1200m 오래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초반 페이스 조절을 잘했다. 선두권에서 전혀 지치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중반을 지나면서 1등으로 올라섰다. 내 마음은 이미 서울시 육상 대회에서 뛰고 있었다. 마지막 한 바퀴가 남았다는 친구의 수신호가 보였다. 좋았어. 막판 스퍼트, 전력 질주를 했다. 뒤에서 나를 쫓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독보적 1등이다. 골을 지나 승리의 기쁨은 잠시 뒤로하고 숨을 고르고 있었다. 


계속 뛰더라. 친구들은 나를 앞질러 계속 운동장을 돌더라. 내가 뛴 마지막 바퀴는 마지막 바퀴가 아니더라. 결국 뒤늦게 깨닫고 따라 달려봤지만 내 다리는 이미 서울시 한 바퀴 뛰고 온 다리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어디서 그런 정신력이 나왔는지, 사력을 다해 달린 나는 3등으로 완주했다. 지쳐 쓰러져있던 나에게 그녀가 다가왔다. 무표정한 얼굴로 내 등을 툭 치며 말했다.


“그것밖에 못 뛰냐?”


지금 그녀는 나의 마누라님이고, 나에게 마지막 바퀴라고 수신호를 보냈던 친구는 어디서 뭐 하고 지내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삶이라는 오래 달리기를 미친 듯이 열심히 달리고 있다. 여전히 그녀는 나에게 말한다.


“그것밖에 못하냐?


인생은 생각한 것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사는 게 재미있기도 하다. 드라마를 생각해 봐라. 내 예상대로만 전개되는 드라마라면 매주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며 기다릴 필요가 있겠는가? 때론 조연들의 어처구니없는 수신호가 드라마의 반전을 만들기도 하고, 때론 뜻하지 않은 기회로 드라마는 해피앤딩으로 끝맺음되기도 한다. 지금이 불확실하다고 멈추어 있을 필요는 없다. 나의 실수를 자책하며 주저앉아 있을 필요도 없다. 내 인생이란 드라마는 여러 사람의 인생이 맞물려 만들어 내는 예상치 못 할 이야기의 연속이다. 조기 종영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달려라. 3등으로도 훌륭한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짤그락 짤그락

요란한 소리를

내는 내..

책가방 속 필통에서

아주 오래된

몽당연필

하나를 꺼내었다.

이 연필로

다시..

사랑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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