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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갱년기 앨리스 Mar 06. 2024

엄마표 공부? 벌 받는 엄마.

내 안에 괴물있다

아들의 학업 심각성을 9학년 말에야 파악한 나는, 집에서 아들의 공부를 봐주기로 했다. 수학과 과학은 한국인 학원 선생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영어는 내가 EBS 인강과 교재로 집에서 꾸준히 함께 하기로 했다. 단어도 매일매일 외우고 시험도 보고. 그래 이렇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차근차근 해 나가면 분명 성과가 있을 것이다. 선행은 어렵지만 그동안 놓친 공부는 지금부터 해도 전혀 늦지 않고 금방 따라잡을 것이고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나는 대단한 결심을 했다.


그런데 이 결심은 그랬다. 나 혼자만의 결심이었다.

아직도 공부의 필요성을 1도 느끼지 못한 아들은 달라진 엄마의 눈빛과 결연한 말투에 이끌려 식탁에 따라 앉는다. 아이패드로 필기는 색색으로 예쁘게도 한다. 놀라운 순간이다. 공부하라고 사 준 아이패드가 게임이 아닌 공부 용도로 처음 사용되는 순간이라니. 아이와 인강을 1강부터 하다 보니 구멍이 정말 많다는 게 느껴졌다. '아니 이걸 왜 모르지? 이것도 몰라? 너 학원에서 뭐 한 거야? 이건 초등학생도 아는 거야!' 이런 말들이 나도 모르게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학원을 그동안 안 보낸 것도 아닌데. 학원에서 이렇게 기본적인 내용을 안 가르쳤을 리 없는데.. 내 아들은 외국에 나오기 전 근 1년 넘게 다닌 영어 학원에서 도대체 뭘 듣고 뭘 배우고 뭘 외운 걸까. 내 아이가 말로만 듣던 학원 전기세 내주는 아이였던 것일까. 정말 답답함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참고 참으며 오늘 첫 두 개의 강의를 마쳤다. 단어도 무작정 외우라기엔 버거워 보여 단어 어원도 설명해 주는 EBS 강의도 신청해서 듣고 외우게 했다. 그런데 아들은 생각보다 집중력도, 이해력도, 의지력도 없고, 그저 이 시간을 빨리 끝내고 게임을 할 생각에 대충대충 하려는 마음이 내게 읽혔다. 순간 난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렸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달라진 엄마의 모습에 아이도 적잖이 놀란 눈치다. 사실 나도 내가 놀라웠다. 나도 모르게 발끈한 내 모습은 마치 괴물 같았다.내 속에 아무도 몰래 감춰 두었던 괴물이 튀어나왔다. 내 목소리가 이렇게 큰지. 두꺼운 문제집을 한순간에 두 동강을 낼 정도의 괴력이 있는지도 이번에 알았다. 나도 내가 놀라웠다.


그날 아이는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더니 배가 아프다며 잠이 들었다. 그리고 새벽에 자꾸 깨 약이라도 먹이려 거실에 나온 사이 오바이트를 거실 바닥에 흥건히 해 버렸다. 내가 이렇게 만든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고 후회스럽기도 하고 새벽 4시까지 나 스스로를 질책하며 닦고 또 닦고 빨래를 하며 한숨도 못 잤다. 그리곤 아침에 일어나서 아이는 또 한 번 화장실 앞에서 오바이트를 쏟아냈다. 그날 아이는 학교를 가지 못했고 나는 또 오전 내내 닦고 또 닦고 청소를 해야 했다. 참 좋은 의도로 좋은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나는 폭발했고 아이는 아프고 그 결과로 나는 새벽부터 지금까지 벌을 받고 있다.


사랑스러운 아내이고 인자하고 자상한 엄마이고 싶었는데 내 아들에 대한 욕망뿐 아니라 나에 대한 욕망도 날이 새 버렸다. 아들과 남편에게 들통나 버린 나란 괴물.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공부가 뭐라고 이렇게 아이를 잡아서 이 사단을 만드나 후회하며 하던 엄마표 공부를 접곤 했다. 그런데 이번엔 접을 수 없다. 외국에 있어도 입시는 입시고 지금이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엄마라는 이름은 참 무거운 이름이다.

사랑만 해주면 되는 유년기 자녀의 엄마는 예쁜 엄마다. 나 역시 예쁜 엄마였지만 지금은 괴물이 되어버렸다.

내 자식은 내가 가르치는 게 아니라는 말이 매일매일 실감이 난다. 엄마표 공부하는 집의 엄마와 자식은 어떤 종류의 사람들일까. 정말 DNA가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난 오늘도 허공을 보며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를 보살이라 불러줘"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우리 언니는 첫 딸의 고3 시기를 몇 년 전 지냈고, 지금 둘째의 고3을 겪어내고 있다. 언니는 그야말로 사리가 10캐럿은 나올법한 보살이다. 그렇게 잘 겪어내고 참아낸 언니는 두 딸들과 사이가 매우 좋다. 나도 겪어내고 참아내고 응원해 주는 예쁜 엄마로 남아서 아들과 관계가 좋은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내 몸속에 사리가 생기도록 참고 또 참아 내 안의 괴물이 튀어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두 번 다시 들키면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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