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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갱년기 앨리스 Mar 13. 2024

서울여자가 되고 싶었던 엄마는 이제 국가대표를 꿈꾼다

욕망 아줌마

나의 사춘기 시절 아빠는 나를 땡삐라고 불렀다.

지금 보니, 남편이 나에게 사나워졌다고 한 말에 서운해하거나, 언젠가 튀어나왔던 나의 괴물같이 화내는 모습은 놀랄 일도 아닌 것 같다. 언젠가는 들통 날 내 모습이었다. 나는 집에서 1남 2녀의 늦둥이 막내로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그런데 복에 겨운 소리일지 모르나 나는 엄마 아빠에 대한, 특히 엄마에 대한 애정에 항상 목말라 있었다. 할아버지가 아니라 엄마가 비 오는 날 우산을 가져다줬으면 좋겠고, 집에 오면 할아버지가 아니라 엄마가 맞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나와 나이 차이가 많았던 오빠의 입시 문제로 항상 엄마는 오빠를 챙기느라 바빴고, 외향적인 엄마는 대외적인 사회활동으로도 매일 바빴다. 아빠는 그 시절 여느 아빠들과 다름없이 회사 일로 바빠 언니와 나는 그저 알아서 잘 커주는 착한 딸들이었다. 하지만 난 성질머리도 있고 못된 구석도 있어 착한 언니와는 다르게 땡삐처럼 신경질을 자주 부리곤 했다.


땡삐같던 나는 학교에서는 작고 마르고 수줍음도 많은 얌전한 아이였다.

하지만 내 속에 욕망은 어마어마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땐 뭐든 잘하고 싶었고, 학교에선 늘 칭찬받는 모범생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내 목표는 오직 대관령을 넘어 어떻게든 집을 떠나 서울로 진학하는 거였다. 모르겠다. 그땐 왜 그렇게 내 고향, 강릉이 싫었는지. 어렸을 때 엄마 따라 몇 번 가본 친척 집 서울이 그렇게 좋았다. 지금도 친정에서 서울로 올라오면 8차선 쭉쭉 뻗은 도로에 높은 건물이 즐비한 서울이 너무 좋다. 남편은 가끔 퇴직하고 강아지 키우며 시골 가서 사는 건 어떻냐고 묻는다. 그러나 내 대답은 언제나 No다. 내가 어떻게 넘어온 대관령인데. 난 다시 돌아가지 않을 거고 난 이제 뼈 속까지 서울여자다.


내 욕망은 서울 진출이 끝이 아니었다. 그 작고 겁 많던 아이가 어떻게 혼자 어학연수를 떠날 생각을 했을까. 나도 나지만 우리 언니도 나 못지않게 욕망이 대단했던 거 같다. 언니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도전으로 나도 혼자 캐나다 어학연수를 떠날 엄두를 내게 되었다. 부모님의 금전적인 도움이 있었지만 나머지 모든 준비는 나 혼자 했고 유학원도 못 믿겠다며 밤새 알아보고 끝내는 캐나다 현지 유학원에 도움을 받아 절차를 밟아나갔다. 나는 캐나다로 떠나기 전부터 캐나다와 소통하고 이미 캐나다 시차로 살고 있었다.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이민병에 걸려있던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가능하면 외국에서의 삶도 함께 꿈꿀 수 있는 배우자를 만나길 바랬다.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시부모님이 외국에 계셔서 매년 명절마다 해외여행 겸 시부모님 뵈러라도 해외에 주기적으로 나갈 일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꿈은 이루어진다더니 나는 정말 그런 신랑감을 만났다. 때마침 우리 결혼과 동시에 시아버님이 주재원으로 외국에서 근무하시게 되며 어머님과 해외로 떠나셨고 우린 명절에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다 남편도 주재원 자격으로 해외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회사라는 타의가 아닌 우리의 의지로 해외에 나와 살고 있다.


나는 왜 그렇게 떠나고 싶었을까.

한국에서도 남편의 좋은 직장과 자택 아파트를 소유하고 강남 3구에 살며 부러울 거 없이 지냈다. 그런데 왜 나는 늘 이민병에 걸려있었던 걸까. 며칠 동안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유로운 가족 중심의 삶/ 무한 경쟁으로부터 해방/ 영어에 대한 애증/ 시댁으로부터의 선택적 단절/ 남의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나는 내가 외국에 살며 친청 식구들이 놀러 오는 순간이 적잖은 비율을 차지할 만큼 좋다. 내가 정착한 곳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오면 행복하다. 이렇게 며칠동안 머리를 짜내어 이유를 생각해 보았지만, 사실 위의 이유들이 나를 외국으로 이끄는 확실한 이유인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본능적으로 끌리는 것 같다.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서 사는 게 좋다. 그리고 가끔 한국에 오는 것도 좋다. 처음 주재원 신분으로 우리 가족이 외국에 나가 살 때, 그 때 알게 된 어느 여자분은 비오는 날 부엌 창문을 보면 그렇게 눈물이 난다고 했다. 한국이 너무 그립다고. 나는 그 때 그 말이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외국에서 죽을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임기는 3~4년으로 정해져 있는데 하루라도 더 구경다니고 여행하고 이 나라에서 이 순간을 즐겨도 모자를 판에 왜 눈물이 날까.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렇게 남들이 향수병에 걸려있을 때 나는 신나게 여행하고 돌아다니며 그 나라를 200프로 즐겼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렇게 배짱 두둑히 외국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건, 돌아갈 내 나라, 내 자리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외국을 좋아해도 많이 여행을 다녀도 나는 이민 생각은 없다.  단지 이민병일 뿐.


나 못지않게 외국 생활을 좋아하는 남편 덕분에 세계 각지 여행을 많이 다녔다. 여행을 다니며 우리는 아이에게 매너와 예절을 가르치고 외국에서 우리는 한국 대표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행동으로 인해 외국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생각하는 시선이 좋은쪽으로 혹은 나쁜쪽으로 바뀔 수 있다고. 너는 국가대표로 외국에 나와 있는 거라고. 이렇게 어느새 나의 욕망은 대관령을 넘어 국가대표가 되어있다.


우리 역마살 부부는 아들이 대학만 가면 툴툴 털고 나의 로망인 파리에 가서 비자 기간 꽉 채운 3개월 동안 파리지앵으로 살 거다. 그리고 스위스라면 시골도 마다하지 않겠다. 로잔의 포도농장에 가서 와인도 마실 거고, 오스트리아 빈에 가서는 하루 종일 미술관에서 먹고 마시고 구경하고 예술가의 스피릿에 취해볼 테다.  물론 그때도 우린 국가대표일거다. 우리가 스스로 임명한 대한민국 국가대표. 비록 실현되지 않을지라도 나는 우리의 욕망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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