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닥뜨릴 용기
어느덧 내 나이는 스물다섯, 평생 살면서 내 힘으로 이룬것 하나 없었는데 대학원에 입학한 후 처음으로 성취감이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도 나름 잘 살아왔구나. 그렇게 제주도에서 열심히 살아가던 중 기말고사를 앞둔 날, 아빠한테 전화가 왔다.
“영섭아 큰일났다, 엄마 유방암이란다.”
그 순간, 나는 엄청 당황했다.
암이라니, 그 단어를 듣는것만으로도 무섭지 않은가.
당황하지 않은척 하며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밝은 목소리였다. 밝은척 했던 건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아빠는 이미 명예퇴직을 결정한 상황이었고, 동생은 대학생이었다. ‘그럼 이제 나는 어떡하지?’
나는 참 불효자다. 엄마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도 내 걱정부터 하다니.. 순간적으로 앞으로의 삶이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운이 좋게도, 초기에 발견해서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회복을 위해 일을 쉴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졸지에 백수 집안이 되어버린거다. 그때부터 나는 내 밥벌이는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주말엔 카페알바, 평일 낮에는 영화관, 상담일을 하면서 저녁엔 대학원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쓰리잡을 하면서 지내다 보니 내몸에도 점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사는게 맞는건가? 내가 뭘 위해서 사는거지? 이런 속사정까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이해를 바랄순 없으니 언젠가 좋은날이 오겠거니 버티고 또 견뎌냈던 것 같다.
사실 감사하게도 살면서 금전적으로 부족함 없이 자라왔다. 어떻게보면 나에겐 첫 사회생활이었는데 갑질도 당하고 모욕적인 말들을 들어오면서 정신적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역시나 나는 나약한 사람이었구나.. 부러움과 질투를 많이 받으면서 살았고 혹여나 나보다 힘든 사람들에게 누가 될까봐 강한척하면서 버티려고 했는데 그냥 나는 정신상태부터 글러 먹었구나.. 그렇게 나를 몰아붙이던 찰나에 왕복 2시간 거리를 매일 차로 왔다갔다 하며 눈이 잘 안보이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은 졸음이 밀려와 위험한 순간도 겪었다. 그래서 이제는 내 나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엄마가 요양원에 있던 날, 술에 취해 엄마가 보고 싶어서, 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
“엄마, 미안해.. 괜찮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면 괜찮아질줄 알았는데.. 난 아직 어른이 아닌가봐. 이러면 안되는거 아는데 내가 너무 나약해서.. 사람들 만나는게 너무 무섭고 두려워.. 지금이 아니면 평생 말 못하고 엄마 탓 하며 살 것만 같았어.“
그렇게 2시간동안 펑펑 울면서 그간 있었던 얘기, 학창시절 겪었던 외로움과 상처들을 털어놓았다. 엄마는 다 이해한다며 그 당시에 관심을 주지 못해서 미안했다고 사과를 했다. 그때 이후로 속은 후련했지만 참 스스로를 많이 자책했던 것 같다. 내가 한창 힘들어서 정신과를 다닐때, 고통이 겉으로 드러나질 않으니 ’차라리 암에 걸렸으면 좋겠다‘며 기도했었는데 그게 엄마한테로 가다니..
엄마는 30년 넘게 일을 해왔고 아빠도 정말 힘들게 또 열심히 살아왔다. 가장으로서의 무게감을 이겨내며, 일을 하면서 말이다. 하루빨리 잘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었는데.. 내가 없었다면 아마 부모님이 더 행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모든게 내탓인것만 같고, 너무나 부끄러운 삶이구나..
이후 엄마의 수술 경과가 좋아지면서 내가 하던 것들을 하나둘 정리하기 시작했다.
‘사라지고 싶다,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다..’
그때부터 진정한 행복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걸리는 건 학교,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어떻게든 버텨야지 라는 마음으로 논문 준비를 열심히 했다. 내 인생에 왜 이리 걸리는게 많은지, 논문을 발표하는 날, 10대 시절 이후로 가장 힘든 시련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등학생도 안쓰는 이딴 형편없는 글을 논문이라고 들고 와? 이렇게는 절대 졸업 안시킨다.“
그래도 나름 힘든 와중에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내가 잘못힌거겠지? 라는 생각에 찾아가서 여쭤봤다.
“교수님, 어떤 부분을 어떻게 수정하면 될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니가 알아서 하는거지. 이때까지 뭘 배웠어?”
알아서 하래서 했더니, 참 쉽지가 않다. 그 이후로 계속 연락을 시도했지만 같은 답변만 돌아왔다.
나는 나와 같은 자퇴생의 마음을 듣고 싶어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근데 교수님한테 내용에 대해 물었을때, 하나도 모르고 계셨다. 원래 남이 하던거 하는게 암묵적인 룰이었는데, 아무도 관심없는 분야를 택해서 그런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는 다시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고, 공황장애가 다시 심하게 찾아왔다. 응급실에도 실려가고, 운전하다가 핸들을 꺾어버릴듯한 충동과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느낌에 중간중간 차를 세우고 토하고 다시 가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잘못됐구나, 이건 확실히 잘못되어가고 있다. 떠나자. 한국이라는 나라에 태어나서 내가 행복했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어. 그렇게 나는, 지긋지긋하고 힘든 한국이 싫어서 해외로 떠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