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나를 집어삼켜
학교를 관둔 후, 집 밖을 나서는게 너무 힘들고 두려웠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나를 비웃는것만 같고, 편의점이나 미용실을 가는것도 맘 편히 가기 힘들었다. 검정고시 학원을 등록하고 학원에 가던 날,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당장 죽을것만 같았고, 지하철을 타려고 정류장에 있는데 내 몸을 제어할 수 없을만큼 당장 뛰어들것만 같았다. 나는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고립을 선택했다. 밤마다 심장을 부여잡고 너무 고통스러워 소리지르기 일쑤였고, 예기치 못한 공황이 나에게 올것만 같아 하루하루가 너무 불안했다. 그렇게 은둔형 외톨이가 된 나는, 1년 가까이 방 밖을 나가지 못했다. 주방에서 칼을 보면 나와 누군갈 해칠것만 같았고, 화장실로 가면 목을 맬것만 같았고, 밖을 쳐다보면 뛰어내릴것만 같았다. 그렇게 방에서 버티는게 나와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는거라 생각했다.
하루종일 게임하고, 티비를 보며 지내는 시간이 늘어가면 갈수록, 나는 계속 스스로를 자책했다. 나는 왜이리 나약할까, 다른 사람들은 힘들어도 잘만 살아가는데 나는 왜이리 예민하고 약해빠진걸까. 근데 생각해보면 내탓이 아니잖아, 전부 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들 탓이야, 아니 그냥 이 세상에 인간이 태어났으면 안돼, 지구가 멸망했으면, 누가 제발 나를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했다. 참 나는 죽을 용기도 없는 한심한 사람이구나.
매일같이 파국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혀 살던 날, 우리집 강아지 봄이를 만나게 되었다. 친구가 생긴거다. 이를 계기로 해서 나는 책임감도 생기고 한번씩 밖으로 산책을 나가게 되었고, 상담과 약물치료를 하면서 점차 상태도 호전되게 되었다. 이제 나이는 열아홉, 고3 나이가 되었다.
부모님은 나의 상태를 고려해 전과목 수능 과외를 시켜주셨다. 예전부터 나의 꿈은 피디였고, 무한도전을 보며 나도 무언갈 표현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을 했다. 그렇게 1년간 준비했지만, 아직 나는 부족했나보다. 수능 당일에 글자가 아예 안읽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능을 망치고, 나는 영상을 배우고자 서울로 향했다.
내가 갔던 곳은 학점은행제 기관이었다. 수능 6등급을 맞았으니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래서 빨리 학사학위를 따고 편입해서 성공해야 겠단 생각을 했다. 학교를 관둔 후부터 성공해서, 좋은 학교에 가서 떳떳하게 졸업식에 가고 싶었는데 참 쪽팔린 상황이었다. 그래도 가서 영화 제작도 해보고, 연기도 배우면서 참 재밌었다. 내가 무언갈 만들고 창작하는데에 흥미가 있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현실적으로 내가 성공할 길은 없다고 판단했고 군대 전역 후에 진로를 상담교사로 바꿔 대학원 입시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2년만에 학사 학위를 따고, 면접준비를 하며 정말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든 계기인 당시 상담교사의 말 한마디에 고통스러웠고, 나는 저런 사람이 되자 말고 진심으로 나와 같은 사람들을 도와주는 교사가 되어야 겠다는 게 나의 진로를 정하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근데 이런 사연은 사람들에게 아무 쓸모도, 의미도, 관심도 없었다. 나의 상황과 배경이 나를 가로막았고, 자소서를 30개 넘게 썼지만 어떤 교수님은 학점은행제 출신은 안뽑아준다고까지 말하는 걸 들으며 나는 역시 안되는구나, 왜 남들과 다른길을 선택해서 이렇게 스스로를 힘들게 하는걸까 자책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지만 나는 너무 많이 지는거 아닌가, 친구들이 대학생활을 즐길때 부러워하고, 쟤들은 뭐가 잘나서 나보다 잘 살아갈까 욕하기도 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점점 집어삼키고 있었다. 나는 정말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부모님께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구나. 나는 참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도,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구나.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그때 나이는 스물넷, 그렇게 나는 마포대교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