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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영섭 Sep 25. 2024

탄생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

1997년 4월 3일, 10시간의 진통 끝에 태어난 나는 모두의 축복 속에서 탄생했다. 그 해에만 한국에서 67만여명이 태어났고 나의 탄생이 뭐가 그렇게 특별하겠냐마는 가족들에게 나의 존재는 소중했나보다. 나의 아버지는 1남 6녀 중 여섯째로 할머니는 아들을 낳기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셨다고 한다. 특히 대를 이어가는게 소중했던 그 시절에는 장손이 태어나는 게 큰 기쁨이었겠지?


우리 할머니는 무당이셨다. 항상 집안에는 법당이 방 한켠에 있었고 굿으로 돈을 버셨다고 한다.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부모님은 천주교 신자다. 어머니 집안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이었는데 우리집 문 앞에는 부적이 붙어져있고 방에는 성모마리아와 예수님이 계시니 참으로 독특한 풍경이다.


할아버지는 알콜중독이셨다. 아빠가 어릴때는 매일 술만 먹으면 행패를 부리고 다녔다고 한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상황에서 항상 불안에 떨며 살았고 할머니는 그 상황을 피하고자 자식을 두고 도망다니기도 했단다. 아빠와 고모들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린시절 받았던 상처들에 눈물을 흘리고 하소연을 하곤 한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에게 맞으며 이웃들과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가정일이기에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아빠는 그래서 여전히 마음을 닫고 산다.


여튼 나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태어나졌다. 눈 떠보니 고모가 6명이었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새로운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대통령님이라고 부르신다. 나중에 꼭 큰일을 낼 사람이 되길 바라셨나보다. 어릴때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말이 내가 성공해야 집안을 먹여살리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거였다. 사촌들, 여동생과 나를 구분해서 차별하였고 고기반찬은 매일 내 차지였을 정도로 어찌보면 잘못된 사랑을 받아왔다.


어릴때부터 난 혼자서 노는 걸 좋아했다. 어찌보면 그게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것보다 마음이 편했던 걸지도 모른다. 나는 사람들이 하는 말도 잘 들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씀 잘듣고!" 초등학교 시절 귀가 닳도록 선생님께 들었던 말씀이었다. 그렇게 착하게 살고자 했던 초등학교 3학년 때,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충격을 줬던 사건이 터졌다. 일명 '라이터 사건'. 나와 친했던 친구 가방에 누가 장난친다고 라이터를 넣어놨는데 선생님이 그걸 보고 책상에 앉아있던 친구를 발로 차서 책상과 함께 뒤로 나자빠진 뒤 발로 밟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이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거야." 내 마음속의 혼란은 그때부터였다. '사랑? 이게 사랑인가?'


같은 시기, 엄마가 가장 좋아하던 이모가 돌아가셨다. 부모님은 어릴때부터 맞벌이를 하셨는데 그 시절 엄마를 보았을때 느꼈던 짜증과 힘듦, 세상에 대한 원망이 어렸던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할아버지가 6살때 돌아가시고, 나는 주로 하교 후 할머니와 함께 있었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울면서 나에게 찾아왔다. 아빠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아마 다툼이 있으셨던 모양이다. 가정을 책임져야 했던 아버지, 이모의 죽음으로 상심이 컸던 어머니를 보며 내가 겪은 일들로 인해 부모님께 부담을 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가 책임지고 집안의 상황까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한지도 모른다. 그 후 한동안 나는 말을 못했다. 밤마다 깜짝 놀라서 깨기도 했다. 그래도 나를 좋아해주었던 친구들 덕에 어떻게든 학교를 다닐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시간이 지나, 그렇게 혼자만의 상처로 간직한 채 중학생이 되었다.


질풍노도의 시기인 중학교 2학년, 더 큰 사건이 터졌다. 같은 반에 남자가 나 포함 15명이 있었는데 그 중 5명은 수학여행에서 자폐인 친구에게 치약을 억지로 먹여 징계를 갔고 5명은 다른 친구들 사물함을 뿌숴 징계를 갔다. 나는 남은 5명, 그 중 현장에 있었지만 '얘가 왜 안 갔지?' 싶은 친구도 있었다. 비슷한 시기, 내가 살던 대구에서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가 학교폭력의 괴로움으로 인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생겼다. 그 이후 복도를 지나면서 들었던 선생님의 말은 나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에휴 일거리 더 늘어나서 골치 아프네" 내가 생각하던 어른의 모습은 결단코 저 모습이 아니었다. 학생보다 선생님의 입장을 생각하던, 누군가가 괴로움에 몸서리 칠때 그들에게는 빨리 해치우고 싶던 '일'이었던 거다.


그렇게 우리 반은 두명의 선생님이 교체되었고, 결국 학생부장 선생님이 담임이 되어 연대책임이라는 명목하에 전교생 얼차려를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을 의심하게 되고 한국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정을 알수도, 알지도 못한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일'이 될 뿐이고, 누군가는 '공포'가 된다. 누군가의 탄생이,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되기도 한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 보면 비극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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