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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ow김정숙 Jul 22. 2024

할머니의 보약

인공호흡, 그리고 누룽지

내 고향 서편마을 그림 사진을 보며

 1960년대부터 80년대를 할머니와 함께 한 어린시절 이야기


우리 섬마을은 계란을 깨 놓은 모습에 비유하면 쉬울 것 같다.

노른자의 중앙부위는 논, 노른자위와 만나는 흰자위 부분은 마을과 밭이다. 밭을 둘러싸고 있는 부분은 산이고, 흰자위의 가장자리는 바다로 연이어져 있다. 자급자족으로 한해 벌어 한 해를 살아내는 욕심 없이 순수한 마을이다. 빈부격차는 보리밥과 쌀밥의 차이였을 뿐, 집집마다 농작물 해산물이 주재료였기 때문에 풍기는 맛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해 가을에도 엄마는 물물 교환을 하기 위해 육지로 나가셨다.

엄마가 머리에 이고, 등에 진 봇짐에는 미역, 광죽(이름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우뭇가사리, 말린 생선 등 갖가지 해산물이 들어 있었다. 중학교 사회 수업 중에 ‘물물교환, 봇짐장수’ 등의 용어가 나올 때도 엄마의 긴긴 출타와는 무관하게 생각을 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가을걷이 후 떠났던 엄마의 직업명이었다.          

엄마가 떠난 지 10일이 지났다. 1960년대에 통신 수단은 전보, 편지 그리고 인편이었다. 10일이 지나도 돌아오시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는 일은 너무 지루하고 막막했다. 두 가지 마음이 들곤 했다. 사고로 돌아오시지 못할까? 엄마가 이고 지고 올 봇짐 속에는 어떤 것들이 들어 있을까?  



일주일이 지나면서부터는 매일 한번 운행되는 목포에서 오는 배를 기다리는 마음은 애간장이 탔다. 오후 시간이 길고 또 지루했다. 배가 도착하기 한 시간 전부터 마음과 몸은 부둣가에 있었다. 며칠은 허탕이었다.         

그 와중에 할머니가 앓아누우셨다. 엄마의 부재는 너무 큰 일이었다. 온갖 걱정이 밀려왔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할머니의 신께 도와달라는 기도를 한 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힘없는 앓이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이제 내가 죽게 되었으니, 누가 숨을 불어넣어주면 살 수 있으려나?. 누가 ~~?”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제가 할게요. 할머니.”

나는 할머니의 몸을 주무르며 여기저기 숨을 넣기 시작했다. 모든 구멍은 다 찾아가며 긴 숨을 만들어서 불었다. 귓구멍, 똥꼬까지 온몸을 주무르며 인공호흡을 했다. 그리고 차츰 할머니는 기운을 차리셨다. 할머니가 살아나셨다. 특별히 효과가 컸던 곳은 똥꼬 부분이었다. 나의 효심을 시험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곳에 숨을 깊고 길게 넣어서 할머니를 살린 것이다. 할머니는 내가 당신을 살리셨다고 했다. 동네 사람들에게도 자랑했다. 나는 나의 능력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 대견하기도 했다. 그만큼 내 어깨가 올라가기도 했다. 그 후 나는 또 하나의 별명을 갖게 되었다. “**에 숨을 불어넣은 효녀!”라고.

할머니는 나를 특별히 가까이 두셨다. 어딜 가든 따라다녔다.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할머니를 초인종처럼 불렀다.  할머니의 손을 봤다. 부드럽게 웃으며 꼭 쥔 주먹을 내미셨다. 펴보면 요술처럼 무엇인가가 나왔다.    

     

할머니에게 특효약은 길고 ‘깊은숨’만 아니라 ‘누룽지’도 있다. 가난한 살림에 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는 처지였다. 호박에 수제비 뚝뚝 끊어 넣어서 끓인 호박죽은 노랗고 먹음직, 보암직했다. 그런데 나는 호박죽의 호박보다 한 두 개밖에 없는 수제비만 좋아했다. 호박죽 한 그릇을 떠주면 수제비를 건져내고는 남겼다. 소심한 밥투정을 한 것이었다. 엄마의 걱정은 많이 먹지 않는 나의 건강을 염려했고 가난이 자신의 탓 인양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가장 싫어하는 요리는 갈파래국이었다. 보리나 쌀이 여유롭지 못한 가난한 우리집의 저녁식사로 자주 등장하는 메뉴였다. 엄마는 큰 가마솥에다 물을 많이 붓고 갈파래를 넣고 푹푹 끓였다. 펄펄 끓어오르면 불려두었던 보리쌀 한 줌을 넣었다. 보리쌀은 손가락으로 세어도 될 만큼의 양이어서 국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 보리알을 먹고 싶은데 잘 건져지지 않았다. 숟가락으로 낚시를 하듯 조심스레 저으면 걸려들지 않고 갈파래와 국물만 입으로 들어왔다. 나는 쉽게 포기하고 숟가락을 내려놓곤 했다. 엄마의 마음만 헤집어 놓았다. 

가난의 증표는 갈포래국이었다. 엄마는 진짜 배고프면 그것도 맛있다고 했고, 나는 단식으로 대치했다. 

지금은 갈파래국이 별미라고 돈을 주고 사 먹는다. 나는 어린시절 지긋지긋했던 요리라서 보고 싶지도 않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소개를 했다. 엄마가 끓여주면 너무 시원했다고.  슬그머니 돈을 주고 사 먹어 봤다. 엄마표 갈포래국 맛은 아니었다. 실망했고 그리웠다. 너무 시원한 맛, 엄마표 갈포래국이.       


할머니는 끓인 누룽지를 좋아하셨다. 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식사를 못 하시면 귀한 보리밥을 담고 바닥에 붙어있는 누룽지를 끓여서 드렸다. 할머니는 없어진 입맛을 돋우는 누룽지를 좋아하셨다. 누룽지가 보약이었다. 밥이 누르지 않았을 때에는 할머니께 누룽지를 만들어 드리기 위해 밥을 남겼다. 솥 밑바닥에 얇게 펴서 불을 때면 누룽지가 되었다. 적당하게 태우면 너무나 고소한 누룽지가 되었다. 나는 고소한 누룽지의 냄새만 맡고 그곳에 물을 조금 부어서 다시 끓였다. 숭늉 겸 누룽지 요리가 되었다.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부드럽게 고아지면 그릇에 담아서 할머니께 드렸다. 할머니는 누룽지 보약을 드시고 벌떡 자리를 털고 일어나셨다.

그리고 내 볼에 입 맞추며 “네가 끓여준 누룽지를 먹으니 힘이 솟는구나!”라고 칭찬을 해주셨다.          


사실은 나도 누룽지를 좋아하는데 할머니께는 양보를 했다. 나는 할머니의 시간 속에 있었다. 나를 예뻐해 주시고 아껴주시고 귀한 것을 헌신적으로 양보해 주신 할머니를 너무 좋아했다. 

학교 갔다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는 나를 맞아주셨다. 간식을 주시며 반겨주셨다. 나의 안정감이었다. 그래서 엄마보다 할머니가 좋았다. 엄마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항상 밖에 계셨다. 나의 일상의 가르침은 할머니의 지혜로 이루어졌다. 콩나물국 끓이는 것을 가르쳐주셨는데 지금도 잊지 않고 그 방식으로 끓인다. 아주 시원한 국물맛을 내는 비결을 전수해 주셨다.           

대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아침에 학교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했는데 저녁에 돌아와 보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나는 세상을 잃은 듯이, 미쳐버릴듯이 울고 또 울었다. 천식이라는 지병이 있었기에 하루하루 사는 것이 힘들어 보이시기는 하셨다. 그래도 내가 없는 사이에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할머니 없는 세상을 생각지도 못했다. 너무 그리워서 얼마간은 눈물로 시간을 보냈다. 초등학교 때처럼 누룽지 끓이는 일을 소홀히 한 것에 후회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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