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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low김정숙 Jul 29. 2024

오징어 놀이

어릴 적 우리들의 놀이

60~70년대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글로 옮기는 시간은 나의 두 가지 인생, 과거와 현재를 살아가는 듯한 신비로움에 빠진다.

현재의 일을 글로 옮기려면 많은 걸림돌이 보인다. 그러나 과거의 일은 자유롭고 편안하고 지금을 의미 있게 살아갈 새로운 힘을 준다.

그래서 오늘도 그 작은 콩 같은 아이를 만나러 간다.     

고학년이 되면서 개울가의 올챙이만 쳐다볼 수는 없었다. 아이는 키가 작았지만 나잇값과 밥값을 해야만 했다. 그 나이에 맞는 밥벌이가 있었다. 그것은 땔감을 주워 오는 일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와서 동네 언니들과 함께 갈퀴와 바구니, 새끼줄을 가지고 산으로 갔다.


그때 아이들이 나무를 하러 가는 발걸음은 어땠을까?  나무하는 일은 더 이상 60년대 이전의 추억일 뿐이다. 어딜 가도 땔감은 쌓여서 썩어가고 있는데 뼛속 깊숙이 본능 같은 행동으로 갈퀴가 떠오른다. 어릴 적 땔감 찾는 어려운 숙제로 스트레스받을 일이 없는데 몇 번이고 가던 길 멈추는 것과  돌아보는 것은 나만의 행동일까?


아이는 나무하는 일이 공부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듦을 느꼈다. 땔감이 있는 곳을 찾아가서  갈퀴로 긁어모으거나 낫으로 베어서 새끼줄로 묶어서 집까지 가지고 와야 한다. 나무를 많이 하지 못했을 때는 떨어진 성적표를 들고 집으로 가는 학생처럼 항상 긴장이 되었다. 아이는 나무를 잘하는 아이가 되는 것을 포기하기까지 언니나 친구들의 나무 둥치에 곁눈질하며 왜소한 몸이 더욱 작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방과 후 활동은 나무하는 일이었다.           


“엄마, 나무하러 갔다 올게요~”하고 담박질 했다. 

나무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소꼴을 안고 있는 큰 산으로 향했다. 섬마을의 산은 아이에게는 에베레스트 산처럼 숨 가빴다. 약속이나 한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언니들을 따라갔다. 산 중턱까지 작은 발로 올라가면 소운동장이 있었다. 언제부터 이곳에 놀이터가 생겼는지는 몰라도 마을이 생기면서 다져진 곳임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버지... 그 위로 쭈욱~~ 누군가 재미를 즐기는 조상님이 시작했을 놀이터였다. 아이들은 그곳을 좋아했다. 학교 운동장의 십 분의 일도 되지 않았지만 산중턱 운동장은 우리의 마음을 넓게 만들어주는 신기한 정기가 나오는 곳이었다. 아이들만 아는 비밀의 장소는 아니었다. 어른들도 이미 경험했을 우리 동네의 무형의 유산이었다.          

 

우리들의 바구니나 주머니에는 놀잇감이 들어 있었다. 즉석에서 구해서 할 수 있는 창의적 놀이도 있었다. 나무를 하러 간 우리들은 일단 놀이를 했다. 누군가 먼저 시작한 놀이가 그날의 놀이가 되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딱지치기, 구슬치기, 핀 따기, 자치기, 야구놀이, 오징어게임, 머위대놀이, 고무줄놀이 등 도구를 이용하기도 했고 우리는 온몸을 이용하여 진도아리랑에 맞춘 춤을 추기도 했다. 때론 둘, 어떨 땐 여럿이 모이면 놀이를 했다. 추운 겨울이나 뜨거운 여름을 제외하고는 날마다 놀이를 즐겼다.       

    

온몸에 땀이 범벅되고 지칠 때쯤 시간을 알려주는 것은 우리의 놀이를 관람한 해였다. 서쪽 하늘에 높이 떠 있던 해가 수평선 바다를 향한 향해 가는 것을 발견했다. 해는 종일 빨갛게 불태운 열기를 안고 바다를 향했다. 아이는 멍하니 해 바라기를 했다. 실눈을 뜨고 잠잠히 해를 바라보며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했다. 묵묵히 들어주는 해의 너그러움에 고마움과 아쉬움으로 인사를 했다.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고 한 번도 어기지 않는 해를 신뢰했다. 미지의 세계 수평선이 거기 있었다. 한참 바라보았다. 물속에 들어가서 온몸을 식힌 후 다시 올 태양을 보며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알려줄 내일을 기다렸다.      

     

해가 바다로 떨어지기 한 뼘정도 남으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목적인 나무하는 일을 부리나케 수행했다. 그런데 아이는 큰일이다. 울상이 되고 말았다. 목표 달성이 힘들기 때문이었다. 땔감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도 어려웠다. 우리들이 날마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왔기 때문에 나뭇잎이나 가지가 갈퀴에 걸리지 않았다. 나무들 사이사이에서 갈퀴질을 했다. 땅을 얼마나 긁었던지 바닥이 빨갛게 되고 피투성이 땅이 되었다. 솔가지에서 마른 솔잎이 떨어지게 하려고 가지를 흔들어도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다. 마지막 방법은 생가지를 끊어서 와야 했는데 언니들은 가능했지만 아이에게는 무리였다. 노는 것을 먼저 하면 안 되는 일이었는데  그만 놀이의 유혹에 넘어가서 주제 파악되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며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거의 날마다 같은 후회를 했다. 엄마에게 혼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다행히 언니는 자신의 나무뭉치를 만든 후 내 것까지 작게 만들어 주었다. 덕분에 편안한 얼굴을 하고 집으로 향했다.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금세 ‘노는 일이 이렇게 재미있다니! 내일 또 가야지! 내일은 오징어놀이를 해야지!’ 맘을 먹었다.      


아이들은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산비탈을 내리 달렸다. 아이는 그만 마음과 일치되지 않는 조급함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앞으로 슬라이딩을 하면서 이마가 깨지는 사고를 당했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고 이마만 찢어졌다. 엄마에게 혼 날 일이 이마의 상처보다 더 큰 두려움이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에 가까운 친척집으로 갔다. 친척 할머니는 된장을 발라주셨다. 그때는 응급처치가 그랬다. 가로로 깊이 찢어진 이마 상처는 점점 나아졌지만, 흉터는 크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겼다. 어릴 적 오징어 놀이가 남긴 훈장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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