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이 가난했다고 말했다.
가난이라는 옷을 입고 태어났고 그 허름한 옷을 벗어보질 못했다.
그런데 나는 불행하다는 생각보다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수많은 일을 경험했다. 그래서 감사하고 또 감격한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자연 속에서 먹을 것을 구해서 살았다. 그것이 자연스럽고 재미있었다. 점심시간에 반찬이 없으면 논시밭으로 달려가서 고추를 따왔다. 그것을 씻어서 된장에 찍어먹으면 되었다. 그리고 마당의 한 자락을 차지한 장독대에는 짜고 매운 것들이 있었다. 내가 가장 잘 열어보는 항아리는 게장이었다. 바닷가에서 바윗돌 사이에서 게들을 잡는다. 작은 참게들을 잡아오면 엄마는 바닷물보다 짜게 소금을 뿌려서 항아리에 담아 놓으셨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우리는 그것을 잡아먹었다. 아작아작 아자작. 입안에서 바스러졌다. 나는 그중 작은 참게들을 골라 먹었다. 밥도둑이었다. 신나게 놀다가 돌아오면 간식이 없었다. 나는 그때도 항아리를 열고 게를 낚아 먹었다. 내일이 없이 살다 보니 걱정이 없었다. 모두가 같은 처지처럼 보여서 비교도 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이 다르다고 느낀 것은 도시로 전학 온 후였다. 버스비가 있어야 했고 학용품도 친구 것과는 질이 달랐다. 군것질도 달랐다. 그래서 가난이라는 것이 불편하고 힘든 것이구나 했다. 엄마와 나는 부업을 했다. 쥐포 껍질 벗기기, 어망 그물 짜기, 수놓기, 마늘껍질 까기 등을 하면 돈이 되었다. 용돈이 되었다. 엄마 옆에서 부업을 해서 받은 돈을 가지고 용돈으로 사용했다. 그물 짜기를 열심히 하다가 어깨통증이 심해지다 못해 감각이 무뎌졌고 등짝이 찢어질 듯한 통증을 얻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을 구해야 했다. 신발공장에 취직을 했다. 무거운 쇳덩이를 들었다 놨다를 하는 일이었다. 종일 가위질을 해야 하는 일도 있었다. 3개월을 지난 어느 날 나는 쓰러졌다. 더 이상 일을 하기에는 역부족인 그 일을 그만두었다.
놀고 있는 나를 보고 안타까움에 주인집 아주머니는 직장을 소개해주셨다. 동네에 있는 소매서점 점원이 되었다. 처음에는 서점에서 일을 하면 책을 많이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고상한 꿈을 꾸었다. 그런데 소매서점이라서 직접 도매서점에 가서 책을 사 오는 일을 했다. 책이 많으면 택시를 이용했지만 양손에 들 수 있는 양일 경우에는 버스를 타고 다녔다. 책은 보기와 달리 무게가 있다. 그 안에 많은 것들을 담고 있어서일까? 나는 체구가 작아서 책에 끌려다녔다. 나는 그 일도 버거웠다.
마음이 콩밭에 있으니 모든 것이 무겁고 힘들었다.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 선생님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공부를 했고 대학에 가기로 했다. 대입학력고사를 치고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등록금 마련을 스스로 해야 했다. 나는 그물 짜는 공장에 취직을 했다. 주간, 야간, 잔업 등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고 손을 들었다. 돈을 많이 벌어야 등록금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달이 지나고 회사 감독자가 불렀다. 대학생이 위장 취업했다고 그만두라고 했다. 나는 아직 대학생이 아니라고 울먹여보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첫 번째 방학에는 대우전자에서 대학생을 위한 아르바이트생을 뽑는다고 했다. 나는 너무 기뻤다. 당당히 지원했고 전자제품을 파는 아르바이트 영업을 했다. 지인들을 찾아다녔고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전자제품을 소개했다. 선풍기, 에어컨, TV 등등 다양하게 팔았고 그해 우리 지역에서 아르바이트생 영업실적 1등을 했다.
그 해 겨울방학에는 대학장 추천을 받아 전에 다녔던 신발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전에 했던 일과는 달리 수월한 쪽의 일을 했다. 그리고 다음 해 여름방학에는 그릇 만드는 도자기 공장에서 일을 했다. 그릇에 전사지를 붙이는 일을 했다. 한 달 한 달 성실하게 일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아르바이트는 대학졸업을 앞두고 심리검사를 하는 곳에서 인턴으로 일을 했다. 그곳에서도 영업을 해야만 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심리검사를 하도록 홍보하는 일이었다. 3개월 정도 인턴으로 일을 했는데 교통비를 버는 정도였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하는 형편이라서 그곳을 그만두었다.
나는 다시 나의 집으로 돌아왔다. 대학을 졸업했어도 직장을 잡지 못한 나는 날마다 살이 빠졌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동기 오빠가 만나자고 했다. 나는 오빠 제안으로 학습지 교사의 일을 시작했다. 아이들을 찾아가서 수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으니 행복했다. 정말 신나게 열심히 했다. 선생님이 된 것이니 여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5년을 열심히 했다. 지친 내 모습을 보았다. 쉬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시작한 일은 축산기구센터라고 이름을 붙인 작은 가게 종업원이었다. 교회 집사님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3개월 정도 쉬운 일을 하다 보니 다시 꿈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장님인 집사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제안을 받았다. 같이 학원을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나야 좋은 일지만.. 신축하는 건물을 2층을 계약했다. 오픈할 때까지는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3개월이 늦어졌다.
오픈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집사님은 자신이 이일을 함께 하지 않을 거라 했다. 자신이 생각해 보았는데 학원을 운영해서 큰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수입을 나눈다는 것이 기대만큼 크지 않을 것 같다고 하시며 나 혼자 운영하라는 것이었다. 전세금이 문제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꿈을 꿀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이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데. 나는 돈이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무책임한 말을 하느냐고 물으려고 했다. 그런데 집사님은 돈을 벌어서 갚으라고 했다. 세상에 이런 분이 있을까? 나는 꿈에도 생각 못한 학원개원의 꿈을. 그분이 대신해 주신 것이다. 학원을 운영한 후 열심히 모아서 원금과 이자를 갚아드렸지만 항상 빚진 마음이다. 빚진 마음은 감사합니다로, 나의 천사로 저장했다.
나는 18년 가까이 학원을 운영하면서 선생님의 일을 했다. 교회학교 교사는 30년 정도, 내가 꿈꾸던 교사의 직분을 맘껏 누렸다.
그리고 나는 40대 중반이 넘어서면서부터는 청소년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꿈을 꾸었다. 이루어주셨다. 천사를 보내주셨다. 나는 내가 천사가 되기를 원한다. 누군가에게 천사로 보내지기를 그래서 천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더니 기회를 주셨다. 찬양사역을 하시는 목사님 부부에게 학원으로 사용하던 공간의 반을 사무실로 사용하도록 통 크게 쐈다. 벌써 10년이 다 되어 간다. 나를 사용하여 주신 그분들께 감사함을 전한다. 우리 모두 천사가 되길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