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가치를 전하는 초록노동자입니다. 이십 년 차 식물연구원이 보는 환경, 자연, 식물에 대한 시선과 경험을 공유합니다.
아침 일곱 시에 출근했다. 아무도 없는 정문 입구를 통과하여 오십 미터만 가면 습지가 있다. 습지에 쨍하게 내리쬐는 청량한 햇살과 습지를 둘러싼 버드나무 가지 끝에 달린 반짝이는 연녹색 꽃과 잎이 어우러진 풍경이 아름다워 잠시 차를 멈췄다. 차에서 내렸는데 공기가 차가워 숨을 내쉬었더니 하얀 입김이 나왔다. 찬 이슬이 내려앉은 토끼풀과 제비꽃이 어우러진 풀밭을 가만가만 걸어갔다. 습지에 사는 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한 펜스 안으로 휴대폰 카메라를 넣어 사진을 찍었다. 버드나무 뒤에 살고 있는 참나무 가지 끝의 색이 조금 변했다. 잎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햇볕이 아까운 날씨다. 매주 월요일 점심시간에 회사 독서모임을 하는데, 친한 동료에게 땡땡이치고 밖에 나가자고 했다. 각자 싸 온 도시락과 커피를 가지고 오성산으로 향했다. 어제도 다녀왔는데, 한눈에 보이는 군산과 서천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오늘도 갔다. 막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 신갈나무 아래의 벤치에서 따듯한 봄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도시락을 먹었다. 커피를 마시고 산책을 하며 탁 트인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너른 바다와 푸릇해진 논과 야트막한 산과 도시. 모든 것이 들어있는 풍경. 와, 와, 서로 이 말을 번갈아가며 얼마나 많이 했는지. 다른 말로는 이 완벽한 날씨와 풍경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이른 아침에 출근하다 보니 오후 세 시나 네 시쯤이면 머리가 멍해지곤 한다. 겨울에는 찬바람 쐬러 잠시 나왔다가 들어갔지만, 오늘은 날씨가 좋아 산책했다. 내가 일하는 건물에서 열 걸음만 걸어 나가면 숲이다. 건물을 막 걸어 나오는데 진한 향기가 코 안에 와닿았다. 마지막 남은 매화나무 꽃이었다. 꽃잎에 코를 가까이 대고 가슴속 깊은 곳까지 숨을 들이마셨다. 이 향기는 꽃가루를 옮겨줄 곤충을 유인하려고 내뿜는 것이겠지만, 덕분에 내 코도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찼다. 조금 더 걸어가니 도로의 양 옆에서 작은 꽃들이 무리 지어 반겼다. 사방에서 꽃들이 잔치를 했다. 그 잔치에 나도 끼고 싶어 자꾸 다가가 코를 킁킁댔다.
조금 더 걸었다. 조팝나무의 눈부신 흰 꽃이 자태를 뽐내듯 펼쳐져 있었다. 혼자 자랐다면 볼품없어 보일 수 있지만, 무리 지어 자라기에 더 아름다운 꽃. 고향의 논둑에 드문드문 조팝나무 흰 꽃이 피었던 기억이 났다. 조팝나무 꽃은 매화나무 꽃 못지않게 진한 향기가 난다. 조팝나무가 여기저기 심어져 있어서 걸으면서 자주 사진을 찍고, 자주 향기를 맡았다. 오늘 맡았던 꽃 향기 중의 으뜸은 조팝나무 꽃 향기다. 이 꽃으로 향수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식물들을 관찰하면서, 어떤 식물은 음식으로, 어떤 식물은 향수로 개발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봄의 습지도 아름답다. 내가 근무하는 곳에는 농업용수로 썼던 습지도 있고, 원래 논이었는데 습지로 만든 곳도 있다. 자연스럽게 조성해서 지금은 만든 습지처럼 보이지 않는다. 어릴 적 살았던 시골 풍경처럼 습지 사이의 폭이 좁은 길 옆에 버드나무도 살고 오리나무도 산다. 습지 사잇길을 걸으며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이 풍경을 천천히 즐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버드나무도 꽃이 핀다는 사실, 무리 지어 꽃 피고 연둣빛 싹이 돋으면 왕벚나무 꽃 못지않게 아름답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 지금이 아니면 이제 일 년 후에나 보게 될 풍경이다. 틈 날 때마다 자주 들여다봐야겠다.
낮 기온이 이십 도를 넘었다. 아침에는 하얀 입김이 나왔는데, 낮에는 걷다 보니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봄은 찰나이다. 걷기에 적당한 온도, 따듯한 햇볕, 살랑이는 봄바람, 흐드러진 봄 꽃, 이제 막 싹을 틔우는 식물들. 지금 이 자리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모두 소중하다. 짧았던 봄은 가고 이제 곧 긴 여름이 올 것이다. 호로록 지나가기 전에 지금을 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