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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언제나 두근두근

by 벨찬

선이와 나의 일상에 음악 하나를 BGM으로 깔 수 있다면 나는 버스커버스커 1집에 수록된 <꽃송이가>를 고를 것이다. ‘맛있는 거 먹자고 꼬셔, 영화 보러 가자고 불러, 기차 타러 가자고 꼬셔' 원곡의 가사를 조금만 바꿔도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요즘 나는 선이와 데이트하는 듯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애인이 좋아할 만한 데이트 코스를 짜듯,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으면 선이가 좋아할지 온종일 생각한다. 준비한 일정이 성공적으로 적중해 선이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으면, 그것만으로도 그날은 나에게 완벽한 하루가 된다.


얼마 전에는 한창 탈 것에 관심이 많은 선이와 기차 데이트를 했다. 마침, 집 근처를 지나는 교외선이 21년 만에 운행을 재개한 참이었다. 교외선은 대곡에서 의정부를 잇는 철로로, 지금은 레트로 감성을 입은 두 칸짜리 무궁화호 열차가 그 위를 달린다. 기차를 타고 의정부까지 가서 역과 연결된 백화점을 구경한 뒤 간식을 먹고 돌아오는 일정으로 데이트를 계획했다.


선이의 인생 첫 기차역은 일영역이 되었다. 일영역은 간이역이다. 의정부행 열차를 타려면 개찰구를 지나 철로로 내려가 건너편 승강장으로 넘어가야 한다. 평일 오후 일영역, 승강장에는 열차를 기다리는 탑승객이 나와 선이 뿐이었다. 멀리 덜컹-덜컹- 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곧 작게 기차 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낯선 승강장에서 긴장한 듯 콩콩-거리던 선이의 심장이, 기차가 다가올수록 흥분으로 쿵쾅-거리는게 느껴졌다.


일영역에서 기차를 타고 의정부역까지 가는 데는 약 30분이 걸렸다. 사실 우리 집에서 의정부는 굳이 기차를 타지 않아도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다. 열차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그리 근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기차 데이트가 마치 여행처럼 나를 들뜨게 만든 건 오로지 선이 덕분이다. 선이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한껏 흥분된 상태로 기차에 오르는 순간부터 내릴 때까지 “이게 뭐야? 이게 뭐야?” 하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런 선이가 옆에 있으면 누구라도 들뜬 마음이 전염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터널에 들어가면 불이 꺼져 신기하고, 나오면 불이 켜져 놀랍고, 기차 안에는 의자와 창문이 엄청 많아 그것으로 신이 나는 아이다.


아직 세상에 처음인 것이 많은 선이에게는 처음 타보는 기차의 풍경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탐험선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나 역시 선이 옆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데, 흔히 보던 전봇대와 담벼락, 지붕 같은 것들이 왠지 타지의 풍경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을 처음 맞이하는 선이의 두렵고 설레는 두근거림이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는 것을.


뭐든 처음은 두근거리는 법이다. 첫 두발자전거, 첫 교복, 첫 해외 여행, 첫 운전, 첫 출근. 아마 선이가 없는 삶을 살았다면, 서른 중반을 지나는 나는 크게 애쓰지 않는 한 처음을 느끼기 어려운 나날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선이와 함께 살아가는 지금의 나에게는 처음의 두근거림이 가까이에 있다. 선이와 발맞춰 함께 걷다 보면 익숙한 풍경도 처음처럼 새로워진다. 다시 살아볼 수 없는 인생인데, 잠시 이런 시절이 허락된 것이 그저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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