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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지 않는다

by 벨찬

최근 나는 선이와 동해 번쩍, 서해 번쩍 나다니고 있다. 며칠 전에는 인천에서 서해를 보고 나흘 뒤에는 강원도 고성에서 동해 바다에 몸을 담갔다. 바깥 활동을 좋아하는 아이 덕분에 나도 집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며 지내는 중이다. 9월 초의 공기는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서늘하지만, 낮에는 여름처럼 뜨겁다. 바다에서 놀기에 딱 좋게. 이 시기가 금방 지날까, 서둘러 고성 마차진 해변을 찾았고 선이는 튜브를 타고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며 올해 마지막 바다를 만끽했다.


혼자 선이를 데리고 떠난 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직 일인분 몫을 다 하지 못하는 아이라 손이 많이 가 쉽기만 했던 여정은 아니었다. 선이를 챙기며 허겁지겁 밥을 먹다 체해 밤에는 소화제를 먹어야 했고, 물놀이 뒤 추워하는 아이를 돌보면서 허둥지둥 텐트를 접고 짐을 정리하느라 혼자 진땀을 빼기도 했다. 출발 전 아내도 몇 번이나 "둘이 잘 다녀올 수 있겠어?" 하고 걱정했지만, 그럼에도 굳이 떠나는 이유는 분명했다. 아이와 좋은 추억을 쌓고 싶어서.


선이는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도 바다를 무서워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갔다가도 수차례 다시 물속에 들어가는 모습이 바다가 안아주는 감촉을 자세히 느껴보려는 듯이 보였다. 부둣가에서는 낚싯대를 세워두고 맥주와 안주를 먹는 어른들 틈에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어 청포도를 10알 정도는 얻어먹었다. 사슴 농장에서는 옆에 있던 아주머니가 내민 당근을 받아 사슴에게 먹이는 경험도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아이랑 다니다 보면 처음 만나는 사람이 건네는 호의를 자주 접하게 된다. 선이는 어떤 이가 무엇을 주든 거리낌 없이 잘 받는 편이다. 그런 선이를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받아 봐야 줄 수 있으니깐 받을 수 있을 때 많이 받으렴.


이번 여행이 가르쳐준 건, 바다처럼 많은 것들을 안아주고 받은 만큼 많이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이런 다소 진부한 가르침은 아빠의 말보다 여행을 통해 아이가 스스로 깨닫는 편이 훨씬 좋을 것이다. 선이는 무얼 느꼈는지 묻고 싶지만, 아직은 말이 서툴고. 여행 소감을 말할 수 있을 만큼 말이 제법 늘었을 때는 이날을 떠올리지 못할 것 같다.


한쪽에서는 사라질 추억이라 생각하면 어딘지 서글퍼지기도 한다. 처음 아빠랑 바다에 들어갔던 일, 사슴에게 당근을 먹이고 토끼를 쫓아 뛰었던 일, 메밀만두를 먹고 하루 종일 "메밀만두가 너무너무 맛있었어"라고 말했던 일도 선이의 기억 속에서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마차진 해변을 찾아도 선이는 처음 와봤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시간이 결코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일이라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시기에 함께 웃으며 보냈던 이 순간들이 선이의 내면 깊은 샘에 모여, 그의 기질과 정서의 근간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아이의 모든 면을 만들어갈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그래도 욕심이 있다면 선이의 내면 깊은 샘이 맑고 깊고 따뜻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선이가 커가며 어떤 어둠의 조각들이 그 안에 떨어져도 본래의 맑음과 따뜻함을 잃지 않기를. 실패와 고독 속에 한없이 가라앉게 되는 날들에도 그 끝에 어릴 적 모아둔 샘물에 닿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기를. 그리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만을 기억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사랑받은 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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