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는 아이라는 세계로의 초대다. 이곳에서는 복잡하고 무거운 문제들로부터 잠시 해방된다. 대신 주어지는 과제는 아주 단순하다.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먹고, 땀이 뻘뻘 나도록 뛰어놀다가, 쿨쿨 잠에 빠져드는 것. 먹고, 놀고, 자는 일에 충실한 것이 그날그날의 미션이다.
선이와 함께하는 이 단순한 임무 속에서 시간은 평소와 다르게 흐른다. 집 앞 마트에 다녀오는 일은 나 혼자서는 10분이면 충분하지만, 아이와 함께면 30분이 걸리기도 하고 때로는 한 시간이 지나있기도 하다. 햇살이 좋으면 갑자기 그림자 잡기 놀이를 하고, 나비가 지나가면 나비를 따라 나풀나풀 뛰어줘야 한다. 매일 보는 징검다리를 하나하나 밟아보고, 마음에 드는 벤치를 만나면 올라가보기도 하고 앉아보기도 한다. 가깝고 짧았던 시공간이 길게 늘어나고, 일상의 풍경이 놀거리로 가득해지는 마법에 걸리는 셈이다.
아이와 함께하는 이런 시간은 자연스럽게 현실의 고민을 잊게 만든다. 선이는 내가 자신과 전심으로 놀고 있는지 아니면 딴생각하고 있는지 기가 막히게 알아챈다. 역할놀이를 하다가도 내가 잠깐 건성으로 참여하면 나무 블록을 내 입에 넣으며 "아빠도 피자 먹어"라고 하는데, 제대로 먹는 흉내를 낼 때까지 계속 그런다. 그 고집스러운 행동은 나로 다른 잡념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만든다. 그러다 아이가 잠들고 잠시 혼자 소파에 몸을 기댈 때면, 아이라는 세계에 머무는 동안 사회적인 성과로부터 너무 멀어져 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 온라인 강의 플랫폼에서 나에게 협업 제안 메일을 보냈다. 흔치 않은 기회이고, 살림에 보탬이 될까 싶어 고민했지만, 육아와 일을 동시에 잘 해낼 자신이 없어 다음을 기약하자는 답장을 보냈다. 후회는 없지만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닌 결정이었다. 휴직을 한 뒤로 통장 잔액을 확인하는 일이 잦아졌고, 부모님 용돈 챙기는 일이 버거워질 때면 내가 제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다 언제 다시 곁에 왔는지 모를 아이가 살을 비비며 생글거리는 모습을 보면, 역시 이 길이 나에게는 더 큰 행복이라는 걸 확인한다. 무엇보다 선이가 주는 기쁨은 지금이 아니라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나는 이 시간을 더 붙들고 살아내고 싶어진다.
언젠가 내 나이가 들어 기억이 희미해지고,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숲에 홀린 듯 나의 정신이 과거의 한 시점에 머물게 된다면, 나는 이 시절에 갇힌다면 좋겠다. 몸은 늙고 약해졌을지라도, 서로가 서로의 전부인 채 충만한 하루를 함께 살아내던 이 시절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잠시 초대된 아이라는 세계의 막이 내리기 전, 마지막까지 돌려볼 추억의 한 장면이 될 오늘을 소중히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