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할 때 선이가 꼭 가자고 하는 곳이 있다. 바로 보노보노 놀이터다. 이곳에는 여느 놀이터처럼 시소와 미끄럼틀이 있지만, 곳곳에 보노보노 만화에 등장하는 캐릭터 동상들이 서 있다. 예전에는 포로리만 했던 선이가 이제는 보노보노보다 약간 작은 정도가 되었고, 나의 도움 없이도 놀이터 어디든 스스로 갈 수 있을 만큼 자랐다.
선이가 이 놀이터를 좋아하는 이유는 보노보노가 있어서만은 아니다. 또 다른 이유는 놀이터 옆에 어린이집이 붙어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놀다 보면 어린이집에 드나드는 또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선이는 자기 또래만 한 아이가 부모 손을 잡고 어린이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꼭 나에게 묻는다. "형아는 어디 가? 누나는 어디 가?"
아이들을 반갑게 맞아주시는 선생님 뒤로 살짝 보이는 풍경이 선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했다. 매일 아침 아이들이 모이는 문 뒤편에서 어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 창문 너머로 새어 나오는 꺄르르- 소리의 정체는 무엇인지, 어린이집 앞 텃밭에 물을 주는 건 누구인지, 거기서 자라는 열매는 무엇인지, 자신도 물을 줄 수 있을지… 선이는 궁금한 게 많았다.
그러다 아이들이 모두 들어간 뒤 굳게 닫힌 유리문을 콩콩 두드리던 어느 날, 선이가 말했다. "선이도 어린이집이 가고 싶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이와의 시간이란 게 내가 붙잡고 싶다고 해서 영원히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29개월. 선이가 둥지 안에서 입을 쩍쩍 벌리고 어미 새에게 밥을 받아먹던 아기 새 같던 게 정말이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선이가 둥지 밖 세상으로 나아갈 때가 되었나 보다.
마침, 대기를 걸어둔 어린이집에서 입소가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다. 사실 내년 초, 나의 복직 시점에 보내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선뜻 바로 보내겠다고 대답하지는 못했다. 고민을 안고 연락을 준 어린이집 앞으로 무작정 찾아가 보았다. 상담 예약을 한 것은 아니었고, 그저 바깥에서 구경만 하려 했다. 어린이집 담장 안으로는 선이가 좋아하는 모래 놀이터와 장난감 자동차가 보였다. 건물 뒤쪽에는 아이들이 직접 가꾸는 듯한 텃밭도 있었다. 고개를 빼꼼 내민 우리를 본 선생님이 고맙게도 안으로 들어와 보라고 해주셨다. 선이는 '여기가 내가 다닐 곳이군' 하는 표정으로 모래를 밟아보고, 미끄럼틀을 두드려보고, 텃밭의 식물들을 살펴보았다. 잠깐 구경만 하려 했는데 선이는 집에 갈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하늘은 흐렸지만, 선이의 얼굴은 '맑음'이었다. 나는 '선이만 좋다면 지금 보내도 괜찮겠다'고 생각해 다음 날 상담을 잡았다. 상담하는 두 시간 동안 선이는 나를 찾지도 않고 선생님을 따라 어린이집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입소 신청서를 작성했고, 그다음 날부터 선이는 '하늘숲 △△ 어린이집 ○○반 이선'이 되었다.
그로부터 2주가 지난 지금, 선이는 어린이집에서 숲 체험도 하고, 전통놀이도 하고, 과자 파티도 하고, 송편도 빚고, 밥도 먹고 간식도 먹고 낮잠도 자며 지내고 있다. 집에서는 분명 밥을 잘 먹지 않고 낮잠도 쉽게 들지 않는데, 어린이집에서는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니 그저 신기할 뿐이다.
오후 3시 30분, 어린이집 버스에서 내린 선이와 집으로 곧장 가지 않고 동네를 한 바퀴 걸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어린이집에서 뭘 했는지 꼬치꼬치 묻는다. 선생님이 사진을 공유해 주셔서 대략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알 수 있지만, 선이의 입으로 듣고 싶다. 하지만 선이는 좀처럼 자세히 말해주지 않는다. 있던 일보다 지금에 관심이 많아 대답은 하지 않고 "여기 가보자, 저기 가보자"하는 선이다. 이제는 내가 다 알 수 없는, 선이만의 세계가 조금씩 생겨나는 듯하다. 사진 속에서 선이는 내가 본 적 없는 개구쟁이 표정을 짓고 있다. 옆에 앉아 손가락이 살짝 닿아 있는 여자아이는 누구일까. 어린이집에 있을 때 아빠 생각은 날까. 나는 늘 선이가 너무 궁금하다.
저녁에는 둘만의 추억을 쌓으러 밤산책을 나왔다. 이제는 별과 달을 알아서 종종 함께 하늘을 올려다본다. 주변이 밝아 꽤 오래 올려다봐야 별이 보인다. 어둠에 눈이 익으면 "저기도 별 있어" 하며 선이가 손을 쭉 뻗는다. 오늘의 달은 상현달. 모양과 위치를 바꿔주고, 때로는 구름이나 나무 뒤에 숨어주기도 하는 달은 매일의 산책에 이야깃거리를 더해준다. 김소연 시인은 ⌜한 글자 사전⌟에서 달을 "변해가는 모든 모습 속에서 '예쁘다'라는 말을 들어온 유일무이한 존재"라고 표현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유일무이'에 선을 그었다. 선이도 변해가는 모든 모습이 예쁘다.
달을 감상하는 사이, 어느새 선이가 낙엽을 주워 와 내 앞에 서 있다. 동그랗게 말린 낙엽이 오므린 선이의 손 같다. 선이는 낙엽을 비행기처럼 날려보기도 하고, 얼굴에 대며 가면처럼 장난치기도 한다. 그러다 어떤 기준에 따라 낙엽을 선별해 "이건 초콜릿, 이건 딸기" 하며 하나둘 모아 벤치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는 "케이크 완성!"하고 외친다. 왜인지 한껏 들뜬 선이는 혼자서도 저만치 잘 뛰어간다. 너무 멀리 가는 듯하면 꼭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본다. 아빠가 아직 거기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다. 뒤돌아보는 거리. 그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 나를 기다리는 선이를 따라 걷는데, 발걸음에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좋아하는 가을 소리다. 서서히 바람이 쌀쌀해지고 있다. 시간이 조금만 천천히 흐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