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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과 리처드 파커, 그리고 이선

by 벨찬

휴지 한 칸을 뜯어 반으로 접고, 또 접고, 접은 뒤 돌돌 말아 한쪽 콧구멍에 끼운다. 나머지 한쪽도 같은 방식으로 막는다.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콧물이 줄줄 흐를 때 사용하는 방법이다.

며칠째 기침과 콧물을 동반한 감기가 떨어지지 않고 있다. 졸음을 유발하는 약 성분 때문에 낮에는 몽롱하고, 밤에는 마른기침이 자꾸 나와 쉽게 잠들지 못한다. 보통 이 정도면 약 먹고 누워 천천히 몸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면 되는데, 아이와 함께 있는 동안은 그럴 수가 없다. 궁여지책으로 병원 놀이를 제안하고 환자 역할을 자청해도 잠깐일 뿐, 아이는 끊임없이 새로운 놀거리를 찾으며 같이 놀자고 요구한다. 결국 나는 콧구멍 두 쪽을 휴지로 막고, 목을 가다듬은 뒤 한껏 텐션을 올려 아이와 장단을 맞추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몸은 땀으로 젖어있고, 하루가 저물고, 아이는 쌔근쌔근 잠에 든다.

오늘도 하얗게 불태웠다고 생각하며 어질러진 거실을 발로 대충 치운 뒤 잠깐 매트에 누웠을 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선이가 두 편의 영화 속 존재들과 닮았다고.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주인공 척은 비행기 사고로 망망대해에 떨어져 홀로 무인도에 살아남게 된다. 함께 섬으로 떠밀려온 화물 상자에서 배구공을 발견한 척은, 공에 얼굴을 그려 넣고 '윌슨'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척은 윌슨을 살아있는 사람처럼 대하며 무인도에서 4년의 시간을 버텨낸다.

'리처드 파커'는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등장하는 벵골호랑이다. 영화의 주인공 파이는 동물원을 운영하는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향하는 배에 탑승한다. 배는 태평양을 건너는 중 폭풍을 만나 침몰하고, 파이는 작은 구명보트에 올라탄다. 그런데 구명보트를 덮은 천막 아래엔 맹수 리처드 파커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파이는 언제든 자신을 잡아먹을 수 있는 호랑이를 경계하며 조각배 위에서 227일을 살아내고 구조된다.


윌슨과 리처드 파커는 주인공이 생존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 먹을 것을 구해오는 것도 아니고 뗏목을 만드는 데 일을 거들어주지도 않는다. 오히려 척은 윌슨을 잃지 않으려 애쓰기도 하고, 파이는 리처드 파커가 굶주리지 않도록 먹을 것을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주인공들은 이들의 존재로 인해 외로움을 달래고 생명력을 얻는다. 고립된 상황 속에서 윌슨과 리처드 파커는 단순히 배구공과 호랑이가 아니다. 이들은 친구이자 동반자가 되어 주인공들에게 살아갈 힘을 내게 한다.


선이는, 당연한 말이지만, 아직 1인분의 몫을 하지 못해 손이 제법 많이 간다. 하고 싶은 건 많은데 많은 일을 온전히 해내지는 못해서 늘 내가 뒷수습을 해야 한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집에 있는 시간 대부분을 누워서 보냈기 때문에, 아빠가 되고 짊어진 육아와 늘어난 가사 노동은 더욱 버겁게 느껴졌다. 특히나 지금처럼 감기에라도 걸렸을 때는 몸을 일으키는 일 자체가 어려워, 선이를 돌보는 일이 유난히 힘들게 여겨진다.

그러나 아이를 건강하고 바르게 자라도록 양육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내가 힘들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나를 일어나게 만든다. 때로는 잠을 줄이고, 때로는 취미생활을 포기하며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선이를 위해 쓴다. 아이가 추울까 걱정되어 그 옆에서 선잠을 자며 밤새 이불을 덮어주던 일은 부모라면 다들 있을 것이다. 더 소중한 것을 위해 덜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일은 당연한 거라 생각하며 그렇게 살아간다. 그러다 보면 나의 고됨도 그리 고되지 않게 되고, 내가 좀 강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항생제가 포함된 알약 다섯 알을 삼키다가, 만약 내가 몸을 일으킬 수 없을 만큼 큰 병에 걸려 선이 곁에 있을 수 없게 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상상하다 이내 고개를 강하게 저으며 그럴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감기 따위는 약 잘 챙겨 먹어서 후딱 낫고, 앞으로는 내 몸을 더 잘 챙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빠라는 이름은 분명 무겁지만, 그 정체성이 나를 더 중요한 것에 집중하게 만든다.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게 하고 소중한 것을 지킬 힘을 내게 한다. 결국 선이는 나에게 윌슨과 리처드 파커 같은 존재다. 힘들게 하지만 힘 나게 하는 존재. 나를 더 성장시키고 강하게 하는 존재. 그 존재가 나를 오늘도 살아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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