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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끼는 열매

by 벨찬

"언덕 위로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가까이 가보니까 보석들이 열매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아주 영롱하게 빛을 내는데, 아주 번쩍번쩍하더라니까. 반짝반짝이 아니고 번쩍번쩍."

잠에서 깬 엄마는 꿈이 생생하고 그 기운이 심상치 않은 것이 혹시 우리 부부에게 아기가 생긴 게 아닌가 싶었다고 한다. 다만 직접 물었다가 아니면 우리에게 부담이 될까, 묻고 싶은 걸 꾹 참았다고. 우리는 추석 선물로 부모님께 임신 사실을 알려드렸고, 엄마는 그제야 마음속에 고이 간직했던 태몽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


태몽의 주인공인 선이는 열매를 보석처럼 좋아한다. 며칠 전 선이는 어린이집에 모과를 가져갔다. 전날 산책길에서 선이가 나무 위에 달린 어른 주먹만 한 모과를 보고 좋아해서 나무를 흔들어 떨어뜨려 줬다. 때굴때굴 굴러가는 모과를 냉큼 주운 선이는 종일 모과 냄새를 맡고 미끄럼틀을 태워주고 이불을 덮어주더니 어린이집까지 데려간 것이다. 조금 갖고 놀다 잃어버릴거라 생각했는데, 집에 돌아올 때도 선이는 모과를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어린이집 선생님께서는 선이가 모과를 가져와 친구들과 함께 냄새를 맡으며 놀았다고 전해주셨다.


선이가 주머니가 있는 옷을 좋아하는 이유도 열매 때문이다. 작은 두 손은 열매 몇 개만 들어가도 가득 차서 넘치는 열매를 담기 위한 주머니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요즘 선이 옷을 정리할 때면 주머니에서 쥐똥나무나 산사나무 열매가 후드득 떨어지곤 한다. 어느 날은 매끈한 도토리 한 알이 나왔다. 그날 알림장에는 선이가 놀이터에서 도토리를 주웠는데 아빠한테 보여준다며 낮잠을 잘 때도 손에 꼭 쥐고 잠들었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선이로부터 도토리를 만날 수 있는 계절은 언제이고 나무는 무엇인지를 배웠다. 이제는 가을이면 혼자 걸을 때라도 참나무 밑을 지날 때 낙엽 속을 살펴보곤 한다.


"다람쥐야, 맛있게 먹어."

우리가 도토리를 다 가져가면 다람쥐들이 배가 고플 거라고, 다 갖고 놀았으면 두고 가자고 하면 선이는 잠시 아쉬운 표정을 짓다가 풀밭에 도토리를 던져준다. 그런데 요즘에는 꼭 하나는 남겨두고 집에 가져가려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것도 다람쥐한테 줄까 하면 "이거는 선이가 아끼는 거야" 하며 다 보이게 등 뒤로 도토리를 쥔 손을 숨기고 나로부터 도망치듯 총총 뛰어간다. 어느새 선이는 아끼는 것도 생기고 그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지킬 줄도 아는 만큼 자랐다. 다람쥐에게 미안하지만 나는 매번 선이의 마지막 도토리는 빼앗지 못한다.


소중한 것이 생긴 만큼 선이는 무서워하는 것도 많아졌다. 그간의 경험과 기억과 감정들이 선이 안에서 어떤 작용을 일으켰는지, 전에는 아무렇지 않아 했던 병원과 목욕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요즘엔 병원에 데려가거나 머리를 감기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은데, 그럴 때면 한번 무서움을 느낀 걸 극복하는 데는 어른이나 아이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한다. 언젠가 선이가 그것들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또 선이가 많이 자랐다며 뭉클해하고 있을 것 같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 없고, 저게 혼자서 둥글어질 리가 없다며 대추 한 알을 묵상한 장석주 시인의 말처럼, 선이 안에도 태풍 불고 천둥 치는 몇 날 몇 밤이 들어서며 영글어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그 시간을 함께 견디는 것뿐이다.


산수유나무는 가지를 아래쪽으로 늘어뜨려 선이도 벤치에 올라서면 나의 도움 없이 그 열매를 딸 수 있다. 찬 바람 부는 11월 초, 우리 동네 산책길 어귀에 있는 산수유나무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단풍잎만 한 선이 손바닥 위에 빨간 산수유 열매를 올려놓아 보았다. 청명한 가을빛이 투명한 산수유 열매에 부서져 영롱하게 번쩍인다. 엄마가 꿈에서 보았다던 그 빛과 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짹짹이들 먹으라고 놔둘까?"

선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풀밭에 열매를 휙 던졌다. 나는 가끔 선이가 던진 열매를 새들이 먹고, 씨앗은 땅에 떨어져 거름이 되고, 그것이 다시 나무를 키워내는 걸 상상한다. 그러면 저 작은 열매 안에 수많은 생명이 있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고 놀랍게 느껴진다. 머리카락이 제법 자라 사과머리를 하고 다니는 선이는 머리통도 동그란 것이 마치 커다란 열매 같다.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한 나는 내가 아끼는 열매를 품에 꼭 안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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