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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가장 큰 기쁨이다

by 벨찬

'퐁당-'

맑고 청아한 소리가 메아리쳤다. 달빛을 닮은 순백의 변좌에 앉은 그는 오랜 전쟁 끝에 승리를 거머쥔 영웅과 같은 모습이었다. 치열한 사투에 온 힘을 쏟아낸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두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이내 그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우리는 두 손을 높이 들고 힘찬 박수와 함성으로 그를 맞이했다. 살며시 미소 짓는 그의 얼굴 뒤로 후광이 비쳐 보였다. 우리는 이날을 기념하기로 했다.

— 이선 2년 6월 15일. 처음으로 변기에 똥을 싸다.


전날 저녁, 육아 동지들을 만났다. 작년까지 함께 육아휴직을 하며 아이를 데리고 자주 보던 사이다. 같은 해에 태어나 모두 고만고만한 아이들이었는데, 얼마나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했던 터였다. 우리의 대화는 어떤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해도 기승전육아가 되었다. 자연스레 선이 친구들은 얼마나 컸나 알게 되었는데, 선이보다 한 달 먼저 태어난 아이도, 석 달 늦게 태어난 아이도 모두 대소변을 가린다는 걸 알았다. 사진으로 본 아이는 변기에 앉아 볼일을 보며 책까지 읽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선이는 아직 변기에 볼일을 볼 줄 몰랐다. 나는 하루에 5~6장씩 기저귀를 갈아 주었다. 기저귀 떼는 데는 여름이 적기라는데. 조금 더 노력해 볼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다음 날. 낮잠에서 깬 선이의 기저귀가 뽀송했다. 자는 동안 쉬를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분명 오줌보가 차 있을 테니 기저귀를 내리고 화장실로 데려갔다. 세면대 밑에 있던 유아 계단을 변기 밑으로 옮기고, 구매한 지 7개월이 지난 아기상어가 그려진 변기 커버를 용도에 맞게 올려놓았다. "좀 더 위로, 옆으로, 그렇지." 선이는 엉거주춤 변기 위에 앉았고 나는 쉬야가 엉뚱한 곳에 튀지 않도록 정밀하게 위치를 조정했다.

잠시 기다림의 시간. "쉬~, 졸졸졸졸~" 효과음을 내주면 더 잘 쌀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마음속에서는 '쌀까? 말까? 쌀 법한데. 안 싸려나?' 하며 기대와 아쉬움이 왔다 갔다 했다. 그런데 갑자기 들리는 소리는 '퐁당'. '쪼르르륵'이 아니고 '퐁당'. 다리 사이로 보이는 물속에는 기저귀 안에서만 보던 그것이 들어있었다. 나는 이 기쁜 소식을 재빨리 거실에 있던 아내에게 알렸고 우리는 화장실에 모여 잘했다고 예쁘다고 최고라고 마르지 않는 칭찬을 쏟아부어 주었다.

이날 아내와 나는 똥 얘기로 하루를 다 채웠다. 그러면서 새삼 다시 깨달았다. 선이가 똥만 싸도 예쁘고, 걸음마만 떼어도 기특하고, 옹알거리며 "엄마, 아빠"를 부르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는 건, 그 존재 자체가 귀하기 때문이란 걸. 선이가 뭘 특별히 잘하거나 대단한 일을 해내서가 아니다. 그저 우리에게 와준 것으로 감사하고, 지금 곁에서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런 사람이다.


우리도 그렇다. 그저 태어남으로 누군가를 경탄하게 하고 경이로움을 불러일으켰을 존재다. 때론 스스로 부정할지라도 사랑하는 어떤 이에게는 여전히 빛나고 아름다우며 고마운 사람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 중요한 사실을 점점 잊어버리는 듯하다. 타인과 비교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해지며 '칭찬'과 '인정'의 기준이 높아진다. SNS를 열면 갓생을 사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육아를 하면서 미라클모닝을 하고 운동을 하고 외국어를 배우고 부업까지 하는 사람들. 그들을 보면 육아 하나에 지쳐 누워서 폰만 보는 자신이 작게만 느껴진다. 어느새 찾아온 내면의 검열관은 속삭인다. 너는 '게으름과 나태함에 절여진 의지박약한, 딱 그 정도까지밖에 안 되는 인간'이라고. 그렇게까지 자신을 평가절하할 필요가 없다고,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다고 다독여 보아도 잠시뿐이다.


선이 내면에도 검열관이 나타난다면 그것은 나만큼 엄격하지 않길 바란다. 존재 자체가 귀하다는 사실이 내면 깊숙이 새겨지길 바라며 매일 밤 사랑한다고 말해준다. 팬티에 똥을 싸고 이불에 쉬를 흘려도 괜찮다고 예쁘다고 잘했다고 얘기해줄 것이다. 선이는 '그냥 있는 그대로'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선이가 학교에 다닐 때쯤 시험 점수가 이게 뭐냐고, 잠만 자고 빈둥거리기만 하냐고 그를 타박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선이가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는 순간, 나는 다시 기억할 것이다. 똥만 싸도 물개박수를 쳐주던 그날의 마음을.


육아를 하다 보면 이상적인 부모상에 자신을 비추어 자신을 참 못난 부모라고 느낄 때가 있다. 아직 아이일 뿐인 자식에게 감정을 쏟아냈을 때. 하루가 긴 주말, 미디어 노출을 오래 했을 때. 제대로 된 반찬을 챙기지 못해 배달 음식으로 대충 한 끼를 넘겼을 때. 나는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이 드는 날이 적지 않다.

하지만 빼꼼히 내민 엄마, 아빠의 얼굴만 봐도 세상에서 가장 밝은 웃음을 짓는 아이는 말없이 알려준다. 엄마, 아빠는 그냥 최고라고.


그러니 자신이 의심될 땐 아이가 달아준 순백의 훈장을 믿자. 그리고 화장실에 들어가 시원하게 똥 한번 누고 말해주자. "잘했어, 최고야, 멋져". 한때 우리는 모두 똥만 싸도 박수를 받았던 사람들이니까. 그 귀함은 어디 가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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