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은 결정의 달이다. 미처 완료하지 못한 버킷리스트 중에서 어느 것에 막판 힘을 불어넣을지 결정해야 한다. 방학 시즌에 여행을 가려면 이제는 숙소와 교통편을 정해야 한다. 계획이 빠른 사람은 아마 이맘때 내년에 이루고 싶은 목표들을 세울 것이다. 연인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MBTI가 J인 사람은 송년 모임 날짜와 장소를 정하려 할 것이다.
학교에서는 12월이면 내년도 인사 준비에 돌입한다. 재직 중인 교사들에게는 업무희망원을 받고, 휴직 중인 교사들에게는 복직 여부를 확인한다. 작년 이 시기에 나는 휴직 연장원을 제출했다. 그로부터 벌써 1년이 지났다. 그러니 이제 곧 031-960-으로 시작하는 전화나 문자를 받게 될 것이다. 조금의 시간을 벌기 위해 '아내와 마지막으로 상의해 보고 며칠 안에 연락드릴게요'라는 답변을 하면, 정말로 최종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내년에 복직할 것인지, 아니면 육아휴직을 이어갈 것인지.
2년이나 휴직을 했으니 당연한 순서처럼 복직하면 될 것을, 나는 무엇이 아쉽고 무엇이 두려워 망설이고 있을까. 아이와 더 함께하고 싶으면서도 일에서 너무 멀어지면 안 될 것 같다는 두 마음이 정확히 반씩 들어차 있다.
나를 붙잡는 건 아마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고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들 속에 살다 보면 멀어지게 될 지금의 풍경일 것이다. 아이가 눈 뜨는 시간에 맞춰 아침 식사를 차리고, 등원 길에 잠시 멈춰 아이와 함께 고양이에게 츄르를 주고, 어린이집에 가기 싫다는 날에는 '그럼 가지 말고 아빠랑 놀자!'하며 숲이나 바다로 훌쩍 떠나는 날들. 이런 일상에 더 머물러 있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일하는 속도가 느리고 쉽게 피곤해하는 나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면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아내도 있고 좋은 동료도 있겠지만, 일에서나 육아에서나 놓치고 빠트리고 실수하는 게 많아지는 만큼 스트레스도 커질 것 같다. 일을 하면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 텐데, 과연 내가 퇴근 후 나를 기다리고 있는 선이를 온 힘을 다해 안아줄 수 있을까.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아지고 예민해지는 성격이라 더 걱정된다.
한편으로는, 이미 2년이나 휴직을 했는데 여기서 더 연장했다가는 2년 반 혹은 3년 만에 일터로 돌아갈 때 더 애를 먹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오랜만에 먼지가 뽀얗게 쌓인 교과서를 펼쳐보니 뻣뻣하게 굳은 뇌가 작동하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어가며 천천히 읽어봐야 머리로 이해가 간다. 쉽게 가르치기 위해 어디서부터 풀어 설명하고 무슨 예시를 들어줘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공들여 만들었던 학습자료도 이제는 구식이 되었다. 전부 새로 만들어야 한다. 행정 업무도 신규와 마찬가지인 상태일 것이다. 이런 문제들은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해결되고, 일에서 멀어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굳어질 것이다.
사실, 가끔 일하는 나의 모습을 상상할 때 기대감이 들 때가 있기도 하다. 휴직 동안 생긴 취미인 글쓰기를 살려 학생들과 글방 동아리를 만들면 재미있지 않을까. 잘하면 학교 예산으로 아이들이 쓴 글을 엮어 책으로 만들 수도 있을 것 같다. 수업 준비를 하는 김에 잠들어 있던 유튜브도 부활시켜 볼까. 수익도 나쁘지 않았는데 이대로 묻어두기엔 솔직히 아깝다. 왁자지껄한 아이들 속에서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면 이상하게 내가 살아있고 기능하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아주 가끔이긴 했지만, 초롱초롱한 눈빛들 속에서 열정을 불태웠던 짜릿한 수업도 생각이 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내 안에 교사로서의 정체성이 아주 죽어있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하다.
모두 타당한 길이다. 먼 미래, 정년을 앞둔 나이에 돌아보면 나의 30대 시절에 일을 1년 더 했느냐 안 했느냐는 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아이의 유년 시절, 함께 보내는 시간을 조금 더 확보하는 건 지금 나에게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다. 반대로 일을 한다는 게 무조건 아이와 멀어지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워킹대디가 되면 더 애틋하고 소중한 육아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른다. 결국 많은 사람이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처럼 나도 그 사이의 균형을 찾아갈 것이다. 상황에 따라 힘을 분배할 줄도 알고 경중을 구분하는 지혜도 생길 것이다. 이 또한 아이에게 보여줘야 할 부모의 뒷모습이다.
결국 선택의 문제다. 스스로 내리기 어렵다면, 나의 선택과 가장 관계가 깊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좋지 않을까 싶어 선이에게 물었다.
"선아, 아빠 내년에 복직할까 말까?"
선이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말까!"
검증을 위해 순서를 바꿔 다시 물어보았다.
"그럼, 아빠 내년에 복직하지 말까 할까?"
뭘 또 묻냐는 듯 약간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복직하지 마!"
선이의 우렁찬 목소리에 나는 이것만으로도 이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선이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근데 아빠, 복직이 뭐예요?"
아... 결국 이 선택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