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에 추워. 이거 입어. 가방은 안 챙겨도 돼. 귤은 이따 간식으로 먹어. 천천히. 조심조심."
엄마가 할머니에게 하는 말이 꼭 내가 선이에게 하는 말 같다. 엄마의 가방에는 물, 종이컵, 빨대, 수건 등 뭐가 많이 들어있다. 할머니한테 올 때 늘 챙기는 것들이라고 한다. 내가 선이와 외출할 때 드는 가방도 비슷하다.
할머니는 천호동에 있는 한 요양병원에 계시다. 아직 선이를 보여드리지 못해 선이를 데리고 아내, 엄마와 함께 그곳을 찾았다. 밖에서 벨을 누르니 간병인이 나와서 문을 열어주셨다. 할머니가 누워 계신 침대 머리맡에는 '골다공증 환자. 낙상 주의'라고 쓰여 있었다. 엄마는 능숙하게 할머니를 앉혀 세웠다. 할머니가 누워 계신 자리에는 배변 패드가 깔려있었다. 베개 옆에는 손거울과 빗이 놓여있었고, 침대 옆 서랍장 위에는 갑 티슈와 양말이 보였다. 할머니의 것이라 할 수 있는 물건들은 모두 침대 머리맡 주변에 늘어져 있다. 손에 닿는 거리까지만 할머니에게 하락된 것만 같다. 할머니의 공간이 이렇게나 작다. 몇 개 없는 할머니의 물건을 세어보는 사이 엄마는 할머니를 휠체어에 앉히셨다. 할머니가 요양병원에서 지내기 시작한 7년 전부터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씩 과일과 반찬을 챙겨 할머니를 만나러 오고 있다.
할머니는 열여섯에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피난을 오셨다. 밭에 일하러 나갔다 친척 어른의 손에 이끌려 피난길에 올랐고 그대로 부모와 생이별했다고 한다. 그 시절에 다들 그랬듯 집안의 어른이 정해준 남자와 결혼해 5남매를 낳았지만 셋째 딸이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남편을 잃었고 홀로 노량진 새벽시장에서 생선을 팔며 자식들을 키우셨다.
어렸을 때 명절이면 할머니 집에 온 식구가 모였다. 할머니가 낳은 5남매와 며느리, 사위, 손녀, 손자들까지 모두 모이면 화투 치는 소리,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 문 여닫는 소리, 아이들 뛰어다니는 소리로 집은 아주 시끄러워졌다. 떠올려보면 할머니는 늘 누군가를 기다리고 계셨다. 마지막 사람이 도착할 때까지 누구는 언제 오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얼마나 걸리는지를 계속 확인하시던 할머니다. 사람 소리가 가득했던 집이 명절 다음 날이 되면 얼마나 적막해졌을까. 할머니는 다음 추석이나 설날을 얼마나 오래 기다리셨을까. 할머니가 편찮아지신 이후 명절이 되어도 온 식구가 모이지 않는다. 할머니의 일생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진다.
집에 돌아오는 길 인생의 허무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부와 명예를 누리던 사람이라 해도 결국은 모두 늙고 죽는다. 집도, 차도, 지식도, 건강도, 관계도 삶의 끝 언저리에서는 남아있지 않다. 내 몸 하나 스스로 일으키지 못하고, 찾아오는 이가 있어야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 내 집 마련이나 좋은 차, 승진 같은 것들을 위해 아등바등 살 필요가 있나 싶다. 모두 결국 사라질 것인데. 그럼, 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을 모르겠는 질문이 맴돌았다. 고속도로 위의 차들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인생의 끝이 결국은 죽음이라는 게 허무하기만 하다.
다행히 선이는 어떤 의지와 목적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며칠 전에는 그의 분명한 목적이 붕어빵으로 향했다. 저녁 반찬으로 먹을 오겹살을 사러 정육점에 갔는데 선이가 길가에 있는 붕어빵 가게를 봤나 보다. 정육점 사장님이 고기를 손질해 주는 몇 분 동안 선이는 끊임없이 붕어빵을 어필했다.
"붕어빵. 붕어빵. 사 줘. 사 줘."
"응. 선아. 고기 사고 붕어빵 사줄게 조금만 기다려."
선이는 그 짧은 시간에도 발을 동동 구르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붕어빵을 바라보았다. 붕어빵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3개에 2천 원. 뜨끈한 붕어 세 마리가 든 종이봉투를 들고서야 선이는 진정이 되었다. 한 마리를 집어 호호 불어 김을 식힌 뒤 선이에게 한입 주었다.
"아삭딱딱해!"
"응? 붕어빵이 아삭아삭해?"
"아니 아삭딱딱해!"
"아 붕어빵이 딱딱하구나!"
"아니~~ 아삭딱딱해~~!"
아삭딱딱한 게 어떤 느낌일지 나도 한입 베어 물어 보았다. 내 느낌엔 바삭바삭아뜨뜨였다. 다시 한번 호호 불어 슈크림이 가득한 부분을 선이에게 주었다. 꼬리 부분은 내가 마무리하고 남은 두 마리는 집에서 엄마랑 먹자고 했다. 붕어빵 몇 입으로 만족했는지 선이도 순순히 동의했다.
하나에 600원 정도 하는 붕어빵. 길에 서서 선이와 호호 불어가며 한입씩 먹는 붕어빵이 값비싼 파인다이닝보다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나는 인당 몇십만 원씩 하는 음식은 맛을 떠나 편하게 먹을 수 없을 것 같다. '붕어빵과 잉어빵의 차이는 뭘까, 피자 붕어빵도 팔아주면 좋겠다.' 하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며 선이와 나눠 먹는 600원짜리 붕어빵에는 분명한 행복이 피어오른다. 그 앞에는 삶이니 죽음이니 하는 것들이 끼어들 자리가 없어 보인다. 그저 속이 꽉 찬 붕어만으로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