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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하트와 비행기는 없어도

by 벨찬

전날 밤, 뭔가 빠뜨린 것 같은데 그 정체를 끝내 알지 못하고 찜찜한 마음을 안고 잠에 들었다. 그리고 아침. 선이 가방에 식판, 수저, 물통을 주섬주섬 챙기다 번뜩 어떤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서둘러 키즈노트를 확인해 보니 아뿔싸. 오늘이 선이 체험학습 가는 날이네. 키즈노트에는 준비물로 '엄마표 도시락과 자연식 간식'이 적혀 있었다.


급하게 아이 도시락을 쌌다. 냉장고와 싱크대, 인덕션을 꼭짓점으로 분주히 삼각형을 그리며 뚱땅뚱땅 요리를 시작했다. 출발 전까지 시간이 부족할 듯해서 아직 자고 있는 아내에게 SOS를 했다. "내가 주먹밥 만들게, 과일 좀 준비해 줘." 냉장고 문을 닫는 것도 잊어버린 채 당근, 애호박, 달걀을 넣어 울퉁불퉁한 주먹밥을 빚었다. 선이는 주방에서 분주히 왔다 갔다 하는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졸졸 따라다니며 의자를 끌고 와 주방 위를 기웃거렸다. 처음 만든 주먹밥을 입속에 넣어줬는데, 잘 먹는 걸 보니 급하게 만든 것 치고 맛은 괜찮았나 보다.


주먹밥만으로는 도시락이 다 차지 않아 빈 곳을 김자반으로 채워 넣었다. 간식 통에는 귤과 바나나, 감을 차곡차곡 담았다. 미처 사진을 찍어두지 못했지만 처음 만든 아이 도시락의 모양은 제법 그럴싸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뭔가 아쉽다. 하나가 부족하다. 무엇일까. 선이를 어린이집에 내려주고 돌아오는 길에 비로소 떠올랐다. 문어 소시지! 문어 소시지!!! 도시락이라면 응당 문어 모양으로 칼집을 낸 소시지가 있어야 하거늘. 미안하다, 아들아!


SNS에 어린이집 도시락을 검색해 보면 가히 작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토끼 모양 주먹밥, 하트 모양 계란말이, 비행기 모양 샌드위치. 아이들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을 때 자신을 반겨주는 귀여운 친구들에 '우와' 하고 환호하며, 열린 입속으로 그것들을 쏙쏙 잘 넣어 먹을 듯한 모양새다. 문어 소시지조차 없는 선이가 혹시나 토끼와 하트, 비행기가 까꿍 하고 등장한 옆 친구의 도시락을 부러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시간이 충분했어도 SNS에 올라갈 법한 그런 도시락은 만들어주지 못했을 것이다. 요리를 잘하지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요리란 맛있게 하는 게 아니라 치우기 편하게 하는 영역의 일이다. 그러다 보니 나 혼자 밥을 차려 먹을 땐 원팬 요리를 주로 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프라이팬 하나와 숟가락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이다. 밑반찬을 꺼내 뚜껑을 열고, 식사 후 다시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도 귀찮아 메인 반찬 하나로 끼니를 때운다.


그러니 아이 도시락뿐 아니라 평소에 먹는 밥도 영양가 있게 골고루 차려주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 아이 식판에는 칸이 다섯 개인 것인가. 같은 반찬을 두세 칸에 나눠 담아 구색을 맞춰보아도 마음이 불편하다. 때때로 장모님이나 엄마가 반찬을 해다 주시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내가 좀 장도 수시로 보고 선이가 좋아할 만한 밑반찬도 미리 만들어두면 좋으련만. 그건 좀처럼 노력조차 잘하게 되지 않는 적성 밖의 일인 듯하다.


그래도 어쩌랴. 내 선에서는 최선을 다하려 애쓴다. 식판 다섯 칸을 모두 다른 것으로 채워주진 못할지라도 최소한 알록달록 다채로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하려고 한다. 아침에 노란 고구마와 빨간 사과를 먹었으면 저녁에는 흰 밥과 검은 김, 푸른 고등어를 먹이는 식이다. 설거지가 많이 나오는 반찬은 잘 못 해주어도 그만큼 과일을 많이 먹이며 죄책감을 덜고 있기도 하다.


어쩌면 선이는 어른이 되어도 '집밥'을 그리워하지 않을지 모른다. 장성한 아들이 오랜만에 집을 찾아와 "집에서 먹는 이 뜨끈한 된장찌개가 너무 생각났어." 하며 고봉밥에 된장찌개 한 술 적셔 크게 한입 떠 먹어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우는 풍경은 볼 수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내 방식으로 아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준다. 선이가 "아빠, 해님은 왜 없어졌어?"라고 물으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대답해 주는 것. 밤늦게까지 침대에 누워 재잘재잘 떠드는 선이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것. 창밖으로 새하얀 눈이 내리면 "선아, 우리 나갈까?" 하며 함께 하얀 세상을 밟으러 나가는 것.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생떼를 부리며 바닥에 나뒹구는 선이를 지그시 바라보고 그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 이런 날이 매일 반복되어도 늘 처음 같은 마음으로 선이를 만나는 것.


완벽한 도시락은 못 만들어줘도, 나는 이렇게 선이와 함께하는 순간들을 정성껏 채워간다. 집밥의 추억이 아니라 함께 웃고 떠들고 뛰놀던 시간의 추억을. 요리 솜씨 대신 따뜻한 관심과 응답을.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가 줄 수 있는 것으로 아이를 사랑한다면 포근함이 그리울 때 선이는 언제라도 '집'을 찾아오지 않을까. 사랑은, 최고가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이니까.


선이가 체험학습에서 돌아온 후 나는 도시락통부터 열어보았다. 말끔히 비어 있었다. 요리에 서툰 아빠가 허겁지겁 만든 주먹밥이었지만 모두 먹어준 아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분주한 아침, 있는 것 없는 것 다 해서 도시락을 만드는 데 진땀을 빼며 힘을 다한 아빠의 마음을 알아준 것 같았다. 선이는 화려해 보이는 도시락이 아니라 엄마, 아빠가 자기를 생각하며 만들어준 그 마음으로 충분해지는 아이였다.


그래도 다음번엔 기필코 문어 소시지를 꼭 넣어주고야 말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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