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가 게임 같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한바탕 신나게 놀고 집에 돌아오는 길, 카시트에 파묻혀 곤히 잠든 아이를 보면 오늘 하루 경험치를 많이 쌓았겠구나 싶다. 눈에 보이는 레벨 같은 게 있는 건 아니지만, 짧아진 바지 길이만큼이나 아이는 분명 자라고 있다. 어느새 선이는 혼자서도 화장실 불을 켜고, 뜨겁고 차가운 사이에 미지근함이 있다는 것도 안다. 작정하고 가르친 적이 없는데 보고 들은 것들이 어느 정도 쌓이면 저절로 습득되는 것인지, 아이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학습 과정은 그저 신기하기만 하다.
서너 달에 한 번씩 근처 어린이박물관에 가는 이유는 가깝고 저렴하고 넓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같은 곳을 다시 갔을 때 선이가 얼마나 자랐는지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선이가 아직 걷지 못하고 기어다닐 시기라 유아 전용 공간에서만 놀 수 있었다. 그때의 선이는 열심히 기어봐야 내가 성큼 한 발자국만 걸으면 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32개월의 선이는 어린이박물관에서 혼자 못 가는 곳이 거의 없고, 굳이 내가 여기저기 가보자고 하지 않아도 자기 흥미에 따라 이동하고 머물며 공간을 즐길 줄 안다.
변해가는 건 선이의 팔다리 길이만이 아니다. 올 때마다 선이가 오래 머무는 공간이 다르다. 몇 달 전만 해도 도로 매트 위에서 붕붕카 타는 걸 좋아해서 그리 넓지도 않은 매트 위를 수십 번씩이나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데 지금은 한 번 타더니 별 흥미가 없는 듯 이내 다른 곳으로 이동해버린다. 대신 이번에는 샐러드 만들기 놀이에 푹 빠져서 "이건 양상추, 이건 토마토" 입으로 중계를 해가며 샐러드볼에 장난감 채소를 야무지게 담고, 볼 위에 손을 휘휘 돌려 소스를 뿌리는 시늉까지 한다. 그러고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완성된 샐러드를 엎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한다. 내 눈에는 같은 행동의 반복처럼 보이지만, 아마 선이는 무지개 맛이 나는 샐러드를 연구 중이거나 다람쥐나 토끼에게 줄 도시락을 만드는 중일지도 모른다.
이제 선이가 제법 말을 잘하긴 해도, 아직은 말보다 행동이 더 많은 것을 알려준다.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먼저 가 있다. 샐러드볼 앞에서 한참을 보낸 선이는 이후 물의 힘 체험으로, 다시 화단 가꾸기로 이동해 한동안 머물렀다. 몸과 함께 그의 관심도 움직인다. 아이가 머무는 곳은 지금 그가 관심을 쏟고 있는 세계를 보여준다. 그래서 잘 봐야 한다. 오래 봐야 하고 유심히 봐야 한다. 아이는 계속 변해가는 존재다. 어제 봤다고 오늘 보는 걸 미루어서는 안 된다. 그의 손과 눈이 어디를 향하는지, 무얼 할 때 입이 벌어지고 발가락을 꼭 움켜쥐는지 보아야 한다. 아이만 언어를 배우는 게 아니다. 부모도 아이가 사용하는 몸의 언어를 익혀야 한다. 돌봄이란 입 밖으로 미처 나오지 못한 대상의 무수한 마음을 읽어 내려가는 독해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돌봄'은 '돌다'와 '보다'가 합쳐진 말이다. 한 번 보고 끝이 아니라 돌고 돌며 끊임없이 보는 것. 설거지 도중 고무장갑을 몇 번이나 번거롭게 벗어 던지며 아이를 확인하고, 샴푸 중에도 '혹시나' 하는 기척에 젖은 눈을 뜬 채 문을 빼꼼히 열어 잘 있는지 보고, 잠을 자는 중에도 작은 소리에 깨어 아이의 들숨 날숨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돌봄이고 곧 육아다. 이 고단한 수고의 반복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사랑이나 책임이라는 단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선이와 나 사이의 거대한 마음은 언제나 서로의 곁에 머무는 정직한 몸만이 말해주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