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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찬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내 인생을 뚝 잘라 삼십몇 년짜리 영화를 만든다면, 나는 당연히 엔딩 크레딧에 올라가는 주연 자리에 아이의 이름을 넣을 것이다. 전체 러닝 타임의 10분의 1도 등장하지 않는 인물이 주연으로 불리는 작품이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선이는 3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의 삶 전부를 나에게 내던졌고, 나는 선이로 인해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를 살아갈 힘과, 지금을 버텨낼 이유와, 지나간 시간의 의미를 품을 수 있었다. 내가 100살이 되는 날에도 선이는 이미 한참 전에 나의 품을 떠났겠지만, 눈을 감으면 선이와 함께 웃고 뛰어놀았던 날들이 흘러갈 것 같다. 그러니까 선이는 내 삶의 주연이라 불리는 게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아이였다. 그런데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많이 웃고 행복했을 시절인 그때의 기억은 오래된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희미해져 있다. 그렇다고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 커진 몸 안에 아직 어린 내가 살고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작은 내가 사라지고 커다란 나만 남는 게 아니라, 어린 나를 안에 품은 채 어른의 껍데기를 입는 것이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어른이 된 우리는 모두 겹겹이 껴입은 시간들로 이루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아이를 돌보면서 나는 자주 그 껍질이 하나씩 벗겨지는 기분을 느낀다. 나와 닮은 선이를 보고 있으면, 그가 곧 내 안의 가장 작은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이의 울음, 웃음, 고집, 두려움을 마주할 때마다 나의 두꺼운 껍데기 속 작은 아이로 자꾸 시선이 향한다. 그곳엔 내가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내가 있다. 안쪽 깊은 곳에 있는 인형은 너무 작아 이미 커버린 나의 손으로는 잘 잡히지 않는다. 그 속에는 작은 존재의 손을 빌려야만 만날 수 있는 어린 내가 있다. 선이가 보여준 나의 작은 인형은 나라는 내가 웃고 화내고 사랑하는 방식이 어디서 왔는지 알려준다. 사실 아이를 돌보는 시간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그동안 써 내려간 육아 에세이는 아이의 성장 기록이기도 하면서 나 탐구 일지이기도 하다.


아이를 키우는 모든 이들이 아마 비슷한 시간을 지나고 있을 것이다. 저마다 다른 모습의 아이를,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면서도, 결국 비슷한 발견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모두 조금씩 자라고 있다. 사랑이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지 알아가는 게 육아의 시간이다. 각자의 시절 속에서 기적 같은 아이를 만난 나도 너도, 그저 이 시절을 지나는 동안 마음껏 사랑하고 마음껏 사랑받기를 기도한다. 잠시 잠깐 우리에게 허락된 이 동화 같은 시간이 막을 내리기 전에 다시 오지 않을 이날들을 온전히 살아가길 바란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다. 어둡고 조용한 공간에서 그들은 지나간 장면들을 다시 떠올리고, 느꼈던 감정을 정리한다. 반추의 시간을 충분히 보낸 이들은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과 다른 마음으로 상영관을 나온다. 그리곤 다시 일상을 살아가다가 때때로 영화를 떠올리곤 한다. 그러면 영화가 단순히 소비되고 끝나는 게 아니라 남는다는 느낌이 든다. 육아에도 크레딧이 올라가는 시간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그런 크레딧이 흐르는 시간이 된다면 좋겠다. 바쁘게 지나온 육아의 날들을 돌아보고, 그 안에 있었던 장면들을 떠올려보는 시간. 이야기는 모두 다르겠지만 그 안에 분명 빛나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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