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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 수업

by 벨찬

육아를 하면서 이전보다 더 잘하게 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스토리텔링이다. 놀이터에서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시간이 늦었고, 이제 밥 먹을 때가 되었으니, 집에 가자"는 식의 논리적인 설득은 통하지 않는다. 억지로 안아 데려가려 해도, 온몸으로 버티는 아이를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떼쓰는 힘이 세진 만큼 상상력과 공감력이 풍부해진 아이에게는 약간의 연기를 곁들여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법이 훨씬 효과적이다. "미끄럼틀이 그러는데, 오늘 형아들이랑 많이 놀아서 피곤하대. 이제 자고 싶어서 선이랑은 이만 빠빠이 하고 내일 낮에 또 놀자고 하네. 우리 미끄럼틀이랑 인사하고 갈까?" 이런 이야기에 선이는 순순히 "미끄럼틀아, 안녕. 잘 있어. 내일 또 만나!"하고 나보다 앞서 집으로 뛰어간다.


이런 순간들을 거듭 경험하다 보니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선이와 휴직 전 가르쳤던 중학생들 사이의 공통점을. 그것은 바로 '그냥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생들과 이야기할 때면 그들이 나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음에도 과연 내 말을 알아듣고 있는 것인지 의심이 들곤 했다. 가장 반응이 좋았던 학생에게 방금 말했던 내용을 물어도 "모르는데요"라는 대답이 돌아온 적도 많았다. 때로는 수차례나 강조하며 신신당부했던 전달 사항이 "못 들었는데요"라는 단 여섯 글자로 무력화되는 일을 겪을 때면, 나는 무엇에 그리 힘을 쏟았던가 허탈해지곤 했다.


그런데 잠시 교직 생활에서 벗어나, 더 말이 통하지 않는 28개월의 아이와 함께 지내면서 어떤 소통의 비밀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건 소통의 전제 조건은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나 중심의 언어를 사용하면 대화는 금방 벽에 부딪힌다. 상대방의 언어를 사용해야 비로소 말이 통한다. 대상의 눈높이로 내려가서 그의 감정과 필요를 파악하고, 그가 좋아하는 비유와 이야기로 대화를 풀어가야 한다. 선이와 소통하기 위해선 그가 좋아하는 미끄럼틀을 의인화하고 선이가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이야기를 꾸며 대화를 열어야 한다. 학생들과의 대화도 다르지 않다. 눈높이가 맞지 않는 대화는 금방 끊기고 만다. 대화가 이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방적인 대화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나는 선생이라면 학생들이 좋아하는 게임도 해보고 청소년 사이에서 인기 있는 아이돌 직캠 영상도 가끔씩은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세계를 알아야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눈높이를 맞출 수 있기 때문이다. 휴직 전에는 이 사실을 몰라 나 중심의 언어로 일방적인 소통을 했던 것이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관찰이다.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추는 일은 그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떤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지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이를 위해서는 평소에 그를 잘 지켜보고,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야 한다. 아이가 어떤 때 입이 벌어지고 코를 벌름거리는지, 어떤 상황에 몸을 들썩이며 흥겨워하는지 유심히 살펴야 한다. 학생들이 어떤 주제에 눈을 반짝이는지, 어떤 활동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하는지, 어떤 비유에 자세를 고쳐 앉는지도 보아야 한다. 보아야 알 수 있다. 안다는 것은 아낀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에게 더 쉽게 마음을 열고 소통하기 마련이다.


선이를 돌보며 내 자식 귀한 걸 경험으로 알게 되니, 내 자식뿐 아니라 세상 모든 아이들도 셀 수 없는 어루만짐과 보듬음으로 자라난 귀한 보석 같은 존재임을 진심으로 알게 되었다. 교실에서 마주치는 아이들이 단순히 학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이 이제는 마음 깊이 와닿는다. 육아를 하면서 나는 단순히 기저귀 갈고, 아기 밥을 하고, 목욕시키는 법만 배운 건 아닌 듯하다. 상대를 이해하고, 헤아리고, 눈을 맞추는 삶의 방식을 알아가고 있다. 다시 교직으로 돌아가게 되면 나는 선이를 관찰하듯 나의 학생들을 더 오래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어쩌면 선이 덕분에 내가 조금 더 좋은 선생에 가까워져 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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