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거리

by 벨찬

아이와 여행을 갈 때 나는 단벌 신사가 된다. 몇 박 며칠을 떠나든 남겨온 사진 속 나의 옷차림은 한결같다. 얼핏 보면 그림자인가 싶은 어두컴컴한 옷. 대충 보면 당일치기인 줄 알 법한 착장이다.


이 무거운 캐리어 안에 나의 짐은 고작 한 줌이고, 나머지는 아이 짐이라는 게 놀랍다. 따로 재보진 않았지만, 아이의 무게보다 아이의 여행 짐이 더 무거울지도 모른다. 기본적으로 어린이용 약을 종류별로 챙기고, 이동 중 먹을 간식, 갖고 놀 만한 장난감 두세 개를 넣는다. 거기에 아주 추울 때 입을 옷, 조금 추울 때 입을 옷, 조금 더울 때 입을 옷, 아주 더울 때 입을 옷을 챙기고, 혹시 토를 해서 옷을 버릴 수도 있으니 여벌의 옷도 더 넣는다. 거기에 만에 하나를 대비하여 여분의 여분의 여분의 여분까지 챙기다 보면 캐리어 하나는 금방 찬다. 그럼에도 뭔가 하나 빠뜨려 사달이 나고야 마는 게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이다.


3박 4일 아이와 칭다오 여행을 다녀오면서, 나는 몹시도 선이 몸에 만보기를 달아보고 싶었다. 낮잠도 자지 않고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아이의 체력이 실로 놀라웠다. 선이는 어디를 가던 직진으로 걷는 법이 없고, 벤치에 앉아 잠시 쉬어가는 일도 없다. 걸음 수를 재면 성인의 배로 나올 것이 분명하다. 낮잠도 거르고선 밤이 깊도록 잘 생각 없이 끊임없이 떠드는 모습에, 얘가 나 몰래 커피라도 마셨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이번 여행은 선이와 나, 아내와 엄마가 함께했는데, 선이의 체력이 어른 셋을 합친 것보다 크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칠 줄 모르는 아이를 겨우 재우고 나니, 어째 여행이 휴가가 아닌 훈련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선이가 태어나기 전, 나에게 여행이란 휴식에 가까웠다. 조용한 책방에 머물며 책 냄새를 맡고, 정해진 목적지 없이 골목을 거닐다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러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 창밖을 보거나, 사람들을 구경하거나, 달콤한 케이크를 먹거나. 그러면서 함께 떠난 동행자와 지난날들을 회고하고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게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모습이었다.


지금은 캐리어의 지분처럼 여행도 아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소란스럽게 떠들어도 괜찮은 공원 같은 곳을 찾아다니고, 분위기 좋은 카페에 들어가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빠르게 당만 충전하고 나온다. 꼭 가보고 싶었던 명소를 눈앞에 두고도 아이가 협조해 주지 않으면 발길을 돌려야 하고, 식당이나 숙소를 정할 때도 선택지가 줄어든다. 우연에 기댈 수 없고, 모든 게 계획적이 된다. 칭다오 여행도 그랬다. 마지막 날 밤, 다음 날 일정을 정리하고 선이 옆에 누웠는데 체육대회라도 한 것 마냥 온몸이 쑤셨다. 조용하고 여유롭던 예전 여행이 몹시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그래도 좋았던 건, 일상과의 거리두기였다. 칭다오 바다에서는 냉장고에 정리해야 할 식재료를 떠올리지 않는다. 잔교와 소어산을 걸을 때 빨래 돌아가는 시간을 계산하지 않는다. 일상 속에서는 해결해야 할 일, 미뤄둘 수 없는 일, 내 몫으로 정해진 역할들이 하루를 가득 채운다. 하나하나 보면 별거 아닌 일일지라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에 갑갑함을 느낀다. 여행이라는 비일상은 그 의무들을 잠시 내려놓게 한다. 마치 무거운 배낭을 벤치에 내려놓은 것처럼. 배낭은 여전히 내 것이고 다시 메야 하지만, 그 잠깐만으로도 어깨가 가벼워진다.


앞으로 몇 년간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은 계속해서 체력전이 될 것이다. 조용한 책방과 여유로운 카페는 한참 뒤에나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다. 예전 같은 사색의 시간은 없을지라도, 거리두기는 여전히 일어나니까.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여행은 충분히 의미 있다. 돌아가면 다시 일상이겠지만, 이 짧은 유예가 다시 일상을 살아갈 힘을 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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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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