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밀한 재미

by 벨찬

오금천에는 해마다 겨울 철새 기러기가 찾아온다. 2월 말이면 기러기들은 고향인 북쪽으로 날아갈 채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그래서 이맘때 천변을 걸으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풀밭을 부리로 비벼가며 탐스럽게 식사를 하는 기러기들을 만날 수 있다. 처음 오금천에서 기러기 떼를 봤을 때, 선이도 보라며 "선아 저기 봐, 오리가 밥 먹고 있어!"라고 알려주었다. 그 모습을 보던 지나가던 할아버지께서 "기러기, 오리 아니고 기러기"라며 바로 잡아주셨다. 자세히 보니 오리보다 몸집도 크고 목이 길다. 기러기에게 오리라 한 것이 왠지 미안했고, 그때부터 새들에게 바른 이름을 불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들도 저마다 생김새가 다른데 그동안 참새도 오목눈이도 곤줄박이도 모두 '짹짹이'라고 불렀던 게 조금 무정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산책길에 만난 새들의 이름을 불러주면서 자연스럽게 새를 관찰하는 취미(…랄까?)가 생겼다. 처음 보거나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새를 만나면 사진을 찍어 챗GPT에 물어보고, 괜히 선이에게 설명해주는 척하면서 새에게 말을 건다. "물까치야, 안녕. 어디가는 중이니?“


탐조활동의 대부분은 멈춰있는 일이다. 멀리서, 가만히 새소리가 나는 나무 위나 부스럭거리는 수풀 속을 지켜봐야 한다. 새는 내게 무관심한 것 같지만 작은 움직임도 금세 알아차린다. 그래서 섣불리 다가서는 일을 주의해야 한다. 조금씩 한 걸음씩. 그러고도 조금 먼 곳에서 바라봐야 한다. 욕심을 내면 순식간에 새는 날아간다. 꿈은 언젠가 핸드피딩에 성공하는 것이다. 손에 먹이를 올려두고 새가 직접 날아와 먹게 하는 것. 핸드피딩을 하려면 손을 뻗고 가만히,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 마치 나무가 된 듯. 그 모습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왜 저러고 있나'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대학교 동기들을 만났다. 학교 후문 내리막 사거리에서 모인 우리는 이제는 녹두서점 없는 녹두사거리가 되었다며 변한 것과 남은 것을 셈하다, 남은 것 중 하나인 양꼬치집에 들어갔다. 예전과 달리 지삼선, 향라새우 같은 것들을 시키긴 했어도 나오는 얘기는 모두 십 년도 더 넘은 이야기들이다. 열에 여덟이 결혼을 했고 여섯이 아빠가 되었건만 말과 행동은 지금보다 더 철이 없었던 20대 초중반 때와 똑같다. 그러다 가끔 추억 회상에서 벗어나 대화 주제가 주식, 차, 집 이야기로 흘러갈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말없이 안주만 먹게 되었다.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영혼까지 대출을 끌어모아 집을 샀다는 한 동기의 말에 다들 잘했네, 좋겠다, 축하한다 했지만 뭐가 좋고 잘한 일인 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내가 육아휴직을 연장했다는 소식에는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보통 아빠들은 휴직을 해도 1년 하고 복직하니까, 이미 2년을 했는데 6개월을 연장한 나의 결정이 다들 의아했나 보다. 실제로 1년 넘게 가계 수입보다 지출이 큰 상태이니, 놀람 속엔 살림살이에 대한 걱정과 무슨 대책이 있는 건지 하는 호기심이 섞였을 것이다. 엄마가 휴직 연장 소식을 들었을 때 처음 보인 반응이 "얘가 미쳤나봐"였으니, 친구들의 반응도 수긍이 되었다. 다만 휴직을 이어가 아이를 돌보고 살림을 꾸리며 적게 벌어도 적게 쓰며 사는 것이 나에겐 제일 쉬운 일이라 전혀 놀랄 법한 일이 아니었다.


며칠 뒤, 알고 지내는 작가님이 해남으로 두 달간 떠나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흔이 된 돌싱에 고구마를 키우고 빵을 구워 먹으며, 에어컨과 난방 없이 계절을 나고, 매일 스쿼트 200개를 하며 법문을 크게 틀어놓는 것으로 아래층의 실내 흡연과 윗층의 층간소음에 맞서며 글을 쓰는 분이다. 평소 이 산 저 산 쏘다니시다 이제는 집을 비우고 땅끝마을로 가겠다는 그가 누구보다 자유로워 보이고 강한 생명력을 지닌 사람 같았다. 작가님을 보면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곤 하는데, 그의 삶이 꼭 한 길로만 가지 않아도 괜찮다는 증거 같아서 그렇다. 내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게 좋다. 그러고는 잠시 떠나는 작가님께 행운을 비는 마음으로 몇 자 편지를 적었다. 작가님을 보면 보통의 삶, 평균의 삶이란 게 어쩌면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고. 좀 벗어나 살아도 괜찮다고, 언저리의 길에도 무척이나 멋지고 재밌는 일들이 펼쳐진다는 걸 알려주셔서 감사하다고.


집 베란다 난간에 먹이통을 달았다. 초록색 샐러드 통을 골라 깨끗이 씻고 나뭇가지로 장식했다. 그 안에 선이와 산책길에 주운 빨간 열매와 잡곡, 땅콩을 부숴 놓고 동네 새들을 초대했다. 우리는 매일 아침 블라인드를 올리며 먹이통을 확인한다. 며칠째 그대로이던 먹이가 어느 날엔 바닥이 보일 만큼 비워져 있었다. 누가 다녀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흔적만으로도 마음이 들떴다. 내가 몰래 방구석에서 새들에게 먹이를 주고 그걸 관찰하고 있다는 건 아무도 모를 것이다. 어떤 먹이를 놓으면 좋아할지, 먹이통은 어떻게 꾸며야 할지. 내 집 마련 같은 건 잘 모르겠고, 새 집 마련하느라 몰두하는 이런 시간에 더 머물고 싶다.


얼마 전에는 산에서 아주 튼실하게 생긴 솔방울을 하나 주웠다. 여기서 씨앗을 하나 꺼내 우람한 소나무로 키워볼 생각이다. 물론 싹도 못 내고 실패할 게 뻔하지만, 며칠간이라도 물을 주고 창을 열어 바람이 들게 하고 햇빛이 좋은 자리를 찾아 옮겨주는 그런 일들에 만족을 느낀다. 그러다 운 좋게 조금이라도 초록 싹이 돋아난다면 더없이 기쁠 듯하다. 아무래도 나는 그렇게 오래 걸리고, 남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일들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그런 은밀한 재미 위에 하루하루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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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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