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의 계절이다. 낮은 포근해서 밤은 선선해서 산책하기 알맞다. 알고 있다. 이런 날이 길지 않다는 걸. 꽃봉오리가 벌어지는 모든 과정을 놓치고 싶지 않다. 회갈색 들판이 초록으로 뒤덮여 가는 장면의 목격자가 되고 싶다. 응달진 곳에 마지막으로 남은 겨울의 흔적이 솜사탕처럼 녹아 냇물을 내달리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보고 싶다. 시간이 아까워 되는대로 산책에 나서는 요즘이다. 대부분 산책 친구, 선이와 함께다.
가까운 한옥마을을 며칠간 연속해서 찾았다. 맹꽁이가 우는 연못을 고즈넉한 가옥들이 둘러싸고 처마 너머로 보이는 삼각봉이 그림같이 펼쳐지며 위로는 진관사를 향해 사색의 길이, 아래로는 북한산 계곡물을 따라 둘레길이 이어지는 곳이다. 곳곳마다 소리, 색, 내음이 달라 며칠을 연속으로 걸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말 그대로 다채로운 공간이라 우리 가족만의 산책 명소가 되었다. 한 날은 아내와 선이와 함께 밤에 이곳을 걸었다. "이것 좀 보세요. 요정이에요!" 선이가 자신의 그림자를 보며 말했다. 선이는 밤에 가로등 밑에 서면 무엇으로든 변할 수 있는 마법사가 된다. 원래는 주로 개구리, 토끼, 고양이로 변했는데 이날은 처음으로 요정이 되었다. 선이가 부리는 마법에는 특별한 힘이 있는데, 곁에 있는 사람들도 같은 모양으로 변신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날 한옥마을 밤 거리에는 세 요정이 나타났다 갔다.
집 근처 오금천에는 산수유꽃이 고개를 내밀었다. 검붉은 열매가 다 떨어졌고, 막 터진 꽃눈 사이로 노란 꽃이 올라오는 중이다. 매일같이 오금천을 산책하는 선이가 이 변화를 모를 리 없다. 자신의 안마당과도 같은 이곳에서 그는 나보다 훨씬 앞서 길을 뛰어가곤 하는데, 한달음에 산수유 나무까지 뛰어간 선이가 수줍게 봄인사를 건네는 여린 꽃가지를 잡았다. 선이가 막 태어난 꽃을 꺾을라, 서둘러 뒤쫓아 갔다. 꽃은 꺾으면 안 된다고 말해주려 했는데, 선이는 가만히 꽃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노란 구름처럼 산수유꽃이 만개하는 날을 함께 기대하기로 했다. 어느새 선이는 작은 존재를 보살필 줄 아는 만큼 자라 있다.
집안의 비타자스민에도 꽃봉오리가 올라왔고 한 번 가지치기를 한 여인초도 천장에 닿아 고개를 숙일 만큼 키가 컸다. 한 해 전만 해도 선이가 화분의 흙을 파내고 가지를 흔들어 대서 고생 좀 한 애들인데 다행히 건강하게 살아있다. 오히려 지금의 선이는 "식물 키 쭉쭉 자라게 화분에 물 줄까요?" 하고 식물 대신 내게 환기 좀 시켜달라고 요청하며 이들을 알뜰히 챙긴다. 가끔은 자기가 좋아하는 걸 주고 싶은지 "이건 색종이물이에요. 이건 레고물이에요" 하며 엉뚱한 걸 올려놓는데, 식물들도 기분은 좋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한 번은 자기가 먹던 고구마를 올려주며 "이거(비타자스민)는 밤나무가 될 거고, 이거(여인초)는 도토리나무가 될 거예요." 라며 덕담까지 건네주었다. 선이에게선 이런 동화 같은 말들이 진실하게 흘러나온다.
아침의 산책길은 새들의 노랫소리로 가득하다. 새는 날씨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내는데 따스한 봄날엔 오케스트라 같은 새들의 경쾌한 합주를 들을 수 있다. 바닥에선 오리와 비둘기가 낮은 음을 깔아주고 오목눈이, 곤줄박이, 참새가 가지 위에서 높고 빠른 소리로 무대를 꾸민다. 까치와 직박구리는 때때로 공중을 날아오르며 중간음을 채워준다. 비발디는 〈사계〉 중 '봄' 1악장 악보에 "Canto de' gl'Uccelli"라고 적었다. 새들의 노래라는 뜻이다. 이 대목에서 바이올린 주자들은 트릴과 스타카토로 새들이 서로 화답하는 듯한 풍경을 그려낸다. 악보의 바탕이 된 소네트(sonnet, 시)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Giunt' è la Primavera e festosetti / La Salutan gl' Augei con lieto canto" (봄이 왔고, 새들이 기쁜 노래로 맞이한다.) 선이도 새를 닮았는지 봄 기운에 힘입어 어느 때보다 수다스럽다. 요즘 같은 날에 나는 봄의 일부가 된 것처럼 한없이 평화로워진다. 이 봄바람이 세상 곳곳으로 번져 오늘 하루쯤 누구에게나 동화 같은 평화가 내려오길 바란다.
*최유리 님의 모든 노래를 좋아하는데 그중 <세상아 동화처럼>을 특별히 아껴요. 꼭 선이가 저에게 불러주는 노래 같아서요. 세상은 동화 같고 그렇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