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주말 오후.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거실에서 놀던 선이가 다가오더니 다리 밑에서 나를 올려다보며 물을 달라고 했다. 손의 물기를 대충 털고 선이가 가져온 물통에 물을 따른 뒤 뚜껑을 닫는데 그만, 손이 미끄러졌다. 다행히 물통을 떨어뜨리지는 않았는데 물이 출렁이며 튀어올라 선이 머리 위로 또르륵 떨어졌다. "아고, 괜찮아?", "물이 선이랑 놀고 싶어서 머리에 떨어졌나봐요." 차가운 물이라 놀랐을 법도 한데 기분 좋은 날의 선이는 모든 자극을 놀이로 승화시킨다. 그러고는 물에서 물고기가 연상되고 물고기에서 아기상어 노래가 떠올랐는지 제자리에서 통통 뛰고 빙글빙글 돌며 노래를 부른다. 가사도 제멋대로 춤도 제맘대로.
얼마 전에는 산책 중에 간식통을 든 채로 넘어져 몽땅 쏟아뜨린 일이 있다. 얼마 먹지도 못했는데 아까워 어쩌나 생각하는데 선이는 "제가 동물 친구들 배고플까봐 간식을 나눠줬어요"라고 말했다. 아니 내가 분명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과정을 다 봤는데 이게 무슨 능청스러운 연기인가... 라고 하기엔 그의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옷을 갈아입을 때 선이는 자주 해적이 된다. 옷 갈아입기 싫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도 윗도리가 머리통에 걸리면 선이는 갑자기 즐거워하며 "내가 해적이다!"라고 외친다. 내 눈에는 알라딘이 쓴 터번에 가까운데. 해적 모자가 맘에 드는지 꼭 깔깔거리며 거울로 달려가는 선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는 몰라도 선이의 웃음에는 전염성이 있어 어느새 나도 옷을 뒤집어 해적모자를 쓰고 깔깔거리고 있다.
요즘엔 어린이집에서 놀이를 하나씩 배워오는지 내게 자꾸 뭘 같이 하자고 한다. 그런데 그 놀이의 방법이 내가 아는 것과 조금씩 다르다. 예컨대 숨바꼭질을 할 때면 선이는 늘 술래인데 "아빠는 여기 있어요" 하고 숨는 장소를 지정해준다. 그러고는 한쪽 벽으로 가 팔로 눈을 가린다. "하나, 둘, 일곱, 열!" 숫자도 마음대로다. 그러고는 곧장 자기가 말한 곳에 잘 있는 내게로 달려와 양팔로 꽉 안는다. 가위바위보도 조금 다르다. "가위, 바위, 보!" 구령 뒤에 무얼 내든 상관없다. 가위면 가위로, 바위면 바위로, 보면 보로 상대의 손을 간지럽히는 게 선이의 가위바위보다. 바깥에서 선이가 "아빠는 저리 뛰어가세요" 하면 또 다른 게임의 시작이다. 선이는 경찰, 나는 도둑. 잡힐 듯 말 듯 도망가면 선이는 어디선가 막대기를 주워 들고 "도둑 잡아라 도둑!" 외치며 힘차게 뛰어온다. 마침내 도둑을 잡고서는 "경찰이 도둑 잡았다!" 하며 내 다리를 힘차게 끌어안는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썩이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으면 빨갛게 달아오른 양 볼을 한 선이가 헤벌쭉 웃으며 나를 올려다본다. 그 모습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왈칵 차오른다. 잡혀도 기분 좋은 경찰과 도둑이다.
선이의 놀이에는 패자가 없다. 이기고 지는 것 없이 모두가 즐거울 수 있는 놀이가 나는 무척 마음에 든다. 가끔 친구를 만나 시간을 보내다가도 얼른 집에 가서 선이랑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이가 새로 쓴 기승전웃음이 되는 놀이 안에 있으면 나도 웃음에 무장해제가 되고 단순하게 행복한 사람이 된다. 오래전 해질녘 산책길에 등 뒤로 비추는 햇살에 선이와 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모습을 봤다. 그 모습이 그냥 또 웃겨서 선이와 깔깔거리며 걷는데 뒤에 걷던 젊은 여성분이 말을 걸었다. 둘의 모습이 너무 예뻐서 그림자 좀 찍어도 되겠냐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그림자를 찍어간 그분은 무얼 느꼈던 걸까. 아마 선이로부터 나오는 행복의 향기에 취했던 게 아닐까 하고, 늘 만취인 나는 그날을 종종 떠올린다.
아빠로서 갖고 있는 로망 중 하나는 언젠가 아이, 아내와 함께 셋이서 보드게임을 즐기는 일이다. 아이스크림 사오기, 설거지 하기 같은 걸 걸고 젠가를 하거나, 비가 쏟아지는 날엔 과자를 까먹으며 루미큐브나 부루마블을 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날엔 승패에 목숨 걸고 반칙을 했네 마네 하며 티격태격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또 그대로의 재미가 있지 않을까. 그러다가 또 손을 맞잡고, 간지럼을 태우고, 서로 뒤엉켜 깔깔거리고 있을 것 같다. 규칙 같은 건 상관없이 우리 멋대로, 우리 마음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