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재작년 6월쯤에 '재판 출석 가능한 변호사'로 우리 사무실에 긴급 투입됐었다. 갑작스레 원래 계시던 동료 변호사님이 아프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를 메울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담당 변호사가 바뀐 것에 의문을 품는 의뢰인들이 몇 있었는데, 이유나 씨도 게 중 한 명이었다.
"제 담당 변호사님이 바뀌셨다고 들었어요... 이유나입니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조금 놀랐었다. 회사에서 12살 연상의 부장님과 바람을 피운 상간녀치곤 너무나 여리고 앳된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원고, 그러니까 부장의 와이프가 작성한 소장에는 그녀와 부장님의 불꽃같은 1년간의 러브스토리가 장황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녀는 지방의 공장에서 일하던 생산직 직원이었는데, 서울 본사에서 발령을 받고 내려온 부장님과 바람이 났다.
나이 차이는 문제 되지 않았다. 부장님은 그 나이답지 않게 항상 잘 차려입고 다녔고 머리숱도 많았다.
그에 반해 그녀는 수수한 매력이 있을 뿐 눈에 띄는 여자는 아녔다. 어느 날 회식 자리에서 그녀와 그가 함께 노래방에 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녀는 노래방에서 은근슬쩍 허리에 손을 올리며 노래를 부르는 그가 싫지 않았다.
회사 밖에서 자주 밥도 먹었고, 영화도 봤다. 부장이 유부남인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날 공장에 찾아온 원고를 부장에게 직접 안내해주기도 했으니까.
원고는 이유나 씨와 부장이 나눈 카카오톡 대화, 전화 녹음 내용 등을 모두 제출했다. 대화 속의 이유나 씨는 소심하고 줏대가 없는 스타일이었다.
부장이 만나자고 하면 쪼르르 달려 나갔고, 부장이 오늘 와이프가 오니 만나기 싫다고 하면 알았다고 대답했다. 심지어 자기 대신 와이프에게 택배를 부쳐달라는 부장의 부탁을 들어주기도 했었다.
그녀는 모든 불륜 사실을 인정했다.
원고가 제출한 증거들은 말 그대로 '완벽'했다. 불법으로 수집한 증거들(예를 들면 통신비밀보호법을 위반한 녹음)조차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유나 씨도 알고 있었다. 변호사가 해줄 수 있는 게 많이 없다는 사실을.
다만 원고는 5,000만 원을 배상하라고 소송을 걸었는데 이 금액을 최대한 방어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녀의 편에선 변호사였기에 원고가 제출한 증거들 중 인정할 부분들은 인정하고, 다소 과장된 부분들만 축소해서 사실관계를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미리 얘기했다. 사랑은 혼자 한 게 아니니, 손해배상액이 높게 책정되는 경우 부장님에게 손해배상액에 대한 구상권을 행사하라고. 구상권이란 쉽게 말해 타인의 채무를 대신 변제해 주었을 때 갖는 권리를 말한다.
게다가 소송 당시 원고 부부는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구상권 행사가 더욱 용이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판결이 나오면 생각해 보겠다고 한발 물러섰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아직도 남자분 하고 연락을 하시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재판부는 그녀에게 2,300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원고가 당초 원했던 5,000만 원에 비하면 적은 금액이지만 이제 막 사회생활을 한지 얼마 안 된 그녀에게는 감당하기 버거운 손해배상금이었다.
사무실에 있던 변호사들은 모두 다 그녀가 구상권을 행사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그녀는 구상권을 행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 소송을 더 이상 이어갈 수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리고 어떻게 마련했는지 2,300만 원과 변호사비용 등을 곧바로 마련해서 상대방 계좌로 송금했다.
하지만 난 다른 이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아직도 '불륜 중'이었다.
절대 이혼해주지 않겠다는 아내를 뒤로하고 부장은 계속해서 그녀를 만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2,300만 원의 손해배상액도 20대 초반의 그녀가 준비했다기보단 부장이 힘을 썼으리라.
"그런 경우 많아요. 남자 쪽에서 손해배상금 대주고 계속 불륜하는 경우"
이혼소송에서 잔뼈가 굵은 동료 변호사님이 지나가듯 한마디 얹는다.
마음이 이상해진다.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2,300만 원으로 사랑을 산 것만 같아서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가면 정정당당하게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만날 것이지, 왜 바람을 피울까. 여전히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 중에 하나다.
"왜 그럴까요? 그냥 이혼하는 게 나을 텐데. 남자도."
"비겁하고 욕심만 가득해서 그렇죠. 나이 들어서는 아내랑 자식이 필요할 것 같고, 지금 당장은 어린 여자애랑 놀아나고 싶고. 그런 것 아니겠어요?"
"제가 원고였다면 부장 상대로 이혼 소송 세게 걸었을 텐데, 참 그쪽도 이해는 안 되네요."
"누구 좋으라고 이혼해 줘요. 2,300만 원도 받고, 남편 원하는 대로도 안 해주고. 그게 더 낫지."
시크하신 동료 변호사님은 내 질문에 답을 덧붙였다. 모든 사람들이 손익만 따져서 소송을 하지는 않는다고. 결심이 서야 이혼도 하는 건데 원고는 그럴 만한 결단을 못 내린 것이고, 오히려 지금 상태가 더 남편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유부녀만 이해할 수 있는 세계일까. 아직 미혼의 세계의 머물러 있는 나로서는 '2,300만 원짜리 사랑을 한 불륜 남녀'들도, 그런 남편과 끝까지 이혼하지 않은 원고도, 이해되지 않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