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 씨는 남부러울 것 없는 인생을 살아온 여자였다. 어릴 적부터 장사로 크게 성공한 아버지 덕분에 유복하게 자라왔고, 커서는 치과의사인 남편과 결혼해 부족함 없는 결혼 생활을 했다.
심지어 초등학생, 중학생인 딸 아들은 학교에서 공부도 잘해 영옥 씨의 기를 한껏 세워주었다.
그런 그녀 주위에는 항상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문제는 '돈이 궁한 사람'들도 거기에 포함돼 있었다는 사실이다.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온 영옥 씨는 구김살이 없었고, 남을 의심하는 법도 없었다. 그렇게 그녀는 조리원 동기 최미연에게 5,000만 원을 빌려주게 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친구가 채무자로 변하면 관계도 변한다. 최미연은 5,000만 원을 빌려가 놓고 선 연락이 뜸해졌다.
딱 3개월만 쓰고 전셋집 빠지면 5,000만 원을 돌려주겠다고 호언장담하던 땐 언제고, 이제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변제일이 다가올수록 통화가 되지 않는 날도 늘어난다.
영옥 씨의 속은 타들어가지만 남편에게 말할 수 없었다. 최미연이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길래 그녀의 남편에게 비밀로 하고 빌려준 것이기에.
그렇게 발만 동동 구르다 최미연이 돈을 갚기로 한 그날. 그녀로부터 문자 하나를 받게 된다.
“미안해 영옥아”
그녀는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최미연은 5,000만 원을 갚을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영옥 씨는 남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은 뒤 그 길로 변호사 사무실을 바로 찾았다고 한다. 그게 벌써 2020년이니 4년 전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녀는 우리 사무실을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바로 감쪽같이 사라진 최미연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입사하기 전에 계시던 변호사님은 이미 그녀를 대리해서 민사소송까지 이겨둔 상태였다. 나는 채무자를 대상으로 집행을 하는 업무를 맡았다.
그런데 문제는 재산명시를 해도, 압류를 해도, 뭘 해도 최미연의 주소로 송달이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폐문부재'가 계속해서 떴다. 폐문부재란 우편을 배달하러 갔더니 문이 잠겨있고 사람이 없어 우편이 송달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법원은 계속해서 채무자의 주민등록초본을 확인하라는 보정명령을 내렸다. (보정명령이 있으면 채권자는 채무자의 초본을 발급받아 현재 등록기준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초본을 발급받아온 실장님의 표정에 당황스러움이 가득하다.
"변호사님. 최미연 씨 초본 발급받았는데요...
그게... 사망하셨습니다."
"네? 뭐라고요??"
죽었다니. 두 눈을 똑바로 뜨고 본 초본에는 ‘사망으로 인한 말소’가 떡하니 적혀있다. 심지어 사망한 날은 바로 이틀 전.
최미연은 손영옥 씨보다 5살이나 어렸다. 지병으로 사망할 리는 없었다. 갑자기 교통사고가 나서 사망을 한 걸까? 무어라 의뢰인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할지 감이 안 잡힌다.
“아... 사망이요? 걔가요?...”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이런 식으로 알게 되는 게 그녀도 퍽 충격이었던 듯하다. 의뢰인의 목소리가 떨린다.
“네. 안타깝게도 그렇네요. 지금 승소해서 확보하신 채권들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최미연 씨의 채무도 상속이 되거든요. 상속인들이 상속포기를 하지 않는 한 그 자녀들 및 배우자를 상대로 상환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비정한 말을 읊는다. 어쩌겠는가. 피도 눈물도 없는 돈밖에 모르는 변호사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난 어디까지나 ‘손영옥의 법률대리인‘이다. 내가 맡은 업무는 그녀의 이익을 최대한 보전하는 것이다.
’ 채무자가 사망했으니, 어쩔 수 없네요. 우린 이제 그만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순 없는 상황.
내 설명을 들은 그녀는 생각을 좀 해보겠다고 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로부터 최미연 사망 사건의 전말을 알 수 있었다.
최미연은 도박 중독이었다. 그녀가 돈을 빌린 이유도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오면서 도박을 계속할 자금이 필요했었던 것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대출이 나오지 않자 친구들에게 돈을 빌리러 다녔다. 최미연은 금방 갚을 수 있을 것처럼 굴었다.
사회경험이 풍부한 친구들은 당하지 않았지만, 순진했던 손영옥 씨는 그 마수에 당해 5,000만 원이라는 거금을 선뜻 빌려준 것이었다.
그리고 빚더미에 앉은 최미연은 6살 난 어린 딸과 남편을 뒤로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손영옥 씨는 최미연의 남편으로부터 얼마 전 연락을 받고 이런 내막을 알게 됐다고 했다.
남자는 당장 가진 돈이 없어 5,000만 원을 다 갚진 못할 것 같다며, 비록 적은 금액이지만 1,000만 원이라도 받아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변호사님. 어떻게 할까요? 정말 너무 억울하긴 한데... 저 4년 동안 많이 지친 것도 사실이에요. 1,000만 원 받고 끝낼까요? “
난 항상 ‘선택은 의뢰인의 몫’이라는 전제 하에 조언을 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은 치우친 의견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선생님. 상대방은 상속포기를 해버리면 채무를 갚지 않아도 되는 상황입니다. 당장 1,000만 원이라도 보전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
의뢰인은 고개를 푹 떨군다. 채무자는 도망을 치다 못해 저승으로 가버린 셈이 됐다.
물론 운 좋게도 최미연의 가족들이 상속포기를 하지 않으면 추심은 계속할 수 있지만, 최미연은 도박중독자였다.
그녀에겐 자산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녀의 가족들이 상속포기를 하지 않을 이유는 더더욱 없다. 어쩌면 그 남편이 1,000만 원을 주겠다고 한 것도 정말 최선을 다한 도리였을지도 모르겠다.
저승으로의 도주는 성공적이었던 걸까. 아닐 것이다. 남겨진 그녀의 배우자, 어린 자녀가 떠오른다.
그녀의 사망으로 인해 남겨진 가족들은 평생 씻을 수 없는 상처 속에 살아갈 것이다.
최미연은 죽음으로 도망치면서도 가족들에게 마음의 빚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