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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없는 사회의 조용한 붕괴

우리는 성공하는 법은 배웠지만, 의미를 묻는 법은 잊었다

by Maru Kim Mar 26.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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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a Society Forgets Why It Exists”


얼마 전, 전국의 의대생들이 집단적으로 수업을 거부했다. 환자의 권리나 의료의 공공성을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방침이 향후 자신들의 수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것은 단순한 정책 논란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어떤 인간을 길러내고 있는가, 전문직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국가가 누구를 위해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었다.

한국 사회는 효율적이고 빠르다. 교육은 치열하고, 경쟁은 정교하다. ‘잘 사는 법’은 누구나 배운다. 하지만 그 안에서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운가’라는 질문은 점점 사라진다.

지금 이 글은, 그 사라진 질문을 되찾기 위한 시도다.


교육은 인간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The System is Working — But for What Purpose?)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오랫동안 '성공'을 위한 가장 안정적이고 정당한 경로였다. 부모 세대는 자식의 성적 향상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고, 학생들은 어려서부터 경쟁에 익숙해졌다. 교육은 곧 생존이자 상승의 사다리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성실과 노력을 미덕으로 배우며 자라났다.


그러나 그 교육은 인간을 길렀을까, 아니면 기능을 최적화한 존재를 만들어낸 것일까?


오늘날의 교육은 질문하는 법보다 정답을 빠르게 고르는 법을 가르친다. 토론보다는 문제풀이가 중요하고, 호기심보다 속도와 정확도가 강조된다. 학생들은 자신이 어떤 인간이 되고 싶은지보다는, 어떤 대학에 갈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사유는 사치가 되었고, 자기 성찰은 입시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배제된다.


이 교육 시스템은 매우 효율적이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학업 성취도, 빠른 대학 진학률, 수준 높은 전문직 배출… 외형적으로는 ‘성공한 시스템’이다. 그러나 그 안에서 수많은 학생들은 정체성을 잃고, 무기력과 불안, 우울을 반복적으로 경험한다.


문제는 이 교육이 무엇을 위한 경쟁인가를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험을 통과하고, 스펙을 쌓고, 좋은 직업을 얻은 다음의 삶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쟁에 너무 오래 몰입해왔기에, 삶을 설계하는 능력,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힘을 제대로 갖지 못한 채 사회로 내던져진다.


철학자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인문 없는 교육은 유능한 기계는 만들 수 있지만, 책임 있는 시민은 만들 수 없다”(a society without a humanistic education produces “useful machines rather than complete citizens.”)고 말했다. 지금 한국의 교육은 유능한 인재를 대량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인재들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는 감각을 갖추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이 감각의 부재는, 전문직 종사자들의 윤리적 판단력, 공동체 의식, 책임감에서도 드러나기 시작했다.


직업윤리의 실종, 전문직의 자기보호 본능 (Professionalism Without Philosophy)


시험을 통과하고, 경쟁을 이겨낸 이들은 결국 ‘엘리트’가 된다. 한국 사회에서 엘리트는 곧 전문직이다. 의사, 판사, 검사, 변호사, 그리고 고위 공직자와 정치인까지.

이들은 고도의 지식과 책임을 요구받는 위치에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높은 존경과 보상을 받아왔다. 그러나 지금 이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은 그 ‘엘리트’들이 과연 공공성과 윤리의식을 갖춘 존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을 던지게 만든다.


의대생들이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에 반발해 수업을 거부하고, 인턴과 전공의들이 환자를 방치한 채 병원을 떠나는 일은 단순한 집단행동을 넘어선다. 이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공공의 생명과 직결된 윤리적 책임보다 우선시하는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법조계는 오랫동안 '전관예우'라는 이름 아래, 정의보다 관계와 커넥션이 우선되는 구조를 유지해왔다. 판사 혹은 검사의 퇴임 후 진로는 종종 ‘로펌의 고문’이며, 그들이 맡는 사건은 놀라울 정도로 유리하게 돌아간다. ‘정의의 최후의 보루’가 되기를 포기한 법은, 이제 더 이상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정치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선거를 앞두고는 정의보다 표가, 공익보다 지지율이 중요하다. 공약은 표 계산의 결과물이고, 소신은 여론이 허락할 때만 존재한다. 국가는 공동체의 방향을 설계하는 기관이 아니라, 기득권의 재생산을 위한 플랫폼처럼 기능한다.


이 모든 현상은 전문가 집단이 책임보다는 생존, 윤리보다는 자기 보호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모든 개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스템이 구조적으로 윤리를 보상하지 않을 때, 개인의 양심은 점점 무의미해진다.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은 “현대의 전문직은 책임보다 효율을 먼저 학습한다”고 지적했다. 책임 없는 전문성은 결국 사회 전체의 신뢰를 갉아먹는다. 우리는 지금, 윤리적 감각을 상실한 엘리트의 시대를 목격하고 있다.


욕망의 규격화와 디지털 자아의 소멸 (Technological Homogenization and the Death of Desire)


이제 우리는 누구나 연결되어 있다. 인터넷은 우리를 실시간으로 접속 가능하게 만들었고, SNS는 개인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공유하는 기본 수단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고 평등한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비슷한 것을 보고, 비슷한 것을 원하며, 비슷한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


유튜브는 우리가 어떤 콘텐츠를 좋아할지 예측하고, 인스타그램은 어떤 스타일이 더 많은 ‘좋아요’를 받을지를 가르친다. 넷플릭스는 우리의 취향을 분석해 다음 콘텐츠를 정해준다. 이러한 알고리즘 기반의 플랫폼은 이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욕망을 사전에 구성하고 미리 설계하는 체계가 되었다.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우리는 더 많은 정보 속에 살지만, 점점 더 적은 의미와 함께 산다”(“We live in a world where there is more and more information, and less and less meaning.”)고 말했다. 이 세계에서는 ‘자기 자신’도 하나의 콘텐츠가 된다. 자아는 내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으로 구성된다.


우리는 스스로를 표현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보여지는 방식으로만 존재하고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사람들이 그것이 '강요된 동질화'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선택지는 많아 보이지만, 그 선택들은 이미 플랫폼이 설계해놓은 경로 안에서만 주어진다.


철학자 기 드보르는 이를 “스펙터클의 사회”라고 부르며,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현실을 통해 맺어지지 않고,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로 대체된다”고 말했다.


실제 삶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이고, 깊이보다는 반응 속도, 사유보다는 가시성이 우선되는 사회. 그 안에서 우리는 점점 더 불안정한 정체성, 얕은 공감, 피로한 자아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MIT 교수 셰리 터클은 이를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인 시대”라고 표현했다. 연결되어 있으나 고립되어 있고, 소통하면서도 단절되어 있다. 그 속에서 인간의 자아는 점점 플랫폼이 정한 형식에 따라 ‘설계되는 존재’로 바뀌어간다.


이 디지털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단순한 기술 의존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우리 스스로가 욕망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이미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율적으로 선택한다고 믿는 순간조차, 우리는 설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자기보존적 국가와 철학 없는 정치 (The State as a Self-Defensive Machine)


국가는 원래 공동체의 철학을 구현하는 기구다. 공공의 이익을 설계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며, 다수의 삶이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가도록 이끄는 존재.


그러나 오늘날의 국가는 더 이상 이상이나 비전의 집합체가 아니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 국가는 점점 더 스스로의 생존을 우선하는 구조, 즉 자기보존적 시스템으로 작동하고 있다.


정책은 더 이상 공동체의 장기적 가치에 기반해 설계되지 않는다. 대신, 각종 지지율, 여론조사, 대중 정서의 흐름, 그리고 기득권 집단의 반발 가능성을 고려한 정치적 타산에 의해 움직인다.


개혁은 이상보다 선거 주기에 종속되고, 소신은 여론의 눈치를 보며 점점 사라진다. 그 결과, 국가는 공동체를 이끄는 ‘주체’가 아니라, 민심이라는 시장 속에서 인기와 타협을 거래하는 중개자로 전락한다.


예를 들어, 의사 단체나 검사 집단, 부동산 개발세력처럼 강한 조직력을 가진 집단이 반발할 경우, 국가는 그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개혁의 속도를 늦추거나 아예 회피한다. 공익보다 정치적 비용 최소화가 우선시되는 것이다.


이런 국가 아래에서 시민은 더 이상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라, '지지율의 수치', '선거 전략의 타겟', '정책 수혜자 데이터'로만 존재하게 된다.


정치이론가 웬디 브라운은 “신자유주의 국가에서는 국가는 더 이상 시장을 규제하지 않고, 오히려 시장처럼 행동한다”고 말한다. 시장처럼, 국가는 이제 리스크 관리를 하고, 성과를 포장하며, 이익집단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우리는 정치적 공간에서 점점 더 철학을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는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피하는 기술이 되었고, 공공의 윤리는 정치적 효율 앞에서 점점 밀려난다.


이 모든 현상은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국가는 지금 누구를 위해 존재하고 있는가?


국민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정권 유지를 위한 것인가?


책임지는 권력은 줄어들고, 살아남기 위한 권력만 남아 있는 이 구조 속에서, 정치는 점점 가장 현실적인 무기이자, 가장 철학 없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 Where Do We Go From Here?)


우리는 이제 어느 정도의 생존은 가능해졌지만, 왜 살아야 하는지는 말하지 못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학교는 정답을 가르치지만, 의미를 묻지 않는다. 직업은 수입을 보장하지만, 소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정치는 표를 의식하지만, 방향은 제시하지 않는다.


이 글의 목적은 어떤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해답 이전의 질문을 되찾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이루고자 했던 ‘성공’은 누구의 기준인가?


이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책임을 의미하는가?


진짜 전환은 구조가 아니라 감각에서 시작된다. 누군가의 시선이 아니라,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더 많이 갖기보다 더 깊이 느끼는 삶, 더 빨리 도달하기보다 더 정확히 이해하는 삶을 상상해보는 것.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가장 위험한 것은 악 그 자체가 아니라, 생각 없는 상태”(the greatest danger in modernity was not evil in its classic form, but thoughtlessness)라고 말했다.


지금 이 시대의 문제는 악의 존재보다, 무관심과 무비판, 그리고 질문하지 않음이 만든 공백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성공하는 법은 철저히 배웠다. 하지만 잘 살아가는 법,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감각은 점점 잊혀지고 있다.


그 질문을 회복하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새로운 시대는 시작될 수 있다.


In this moment, perhaps the most radical thing we can do is to think deeply, feel fully, and live deliberately — not in defiance of the world, but in defense of what it means to be truly human within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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