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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당근 Apr 05. 2024

저녁을 사먹는 삶을 살기로 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하여


저녁을 밖에서 사 먹기 시작한 지 3주째다. 아침은 구운 계란과 무가당 두유로, 점심은 학교 급식으로 해결하고 있다. 생식 6개월치를 주문하며 밥 짓기 노동에서 벗어나겠다고 다짐한 지 5년 만에 실천하는 중이다.


인제로 오던 첫 해, 남편은 남편 학교 관사에 살고 있었고 나는 우리 학교 가족관사에 기간제 여선생님과 같이 배정되었다. 그랬는데 마침 인제에 사는 분이 기간제 교사로 뽑혀서 방 3개짜리 가족관사에 혼자 살았다.


혼자 있으니 남편이 슬금슬금 내가 사는 관사로 오기 시작했다. 다음 해에는 아예 남편학교 관사에서 짐을 빼서 우리 학교 가족관사로 옮겨왔다. 대학생이던 둘째 딸이 코로나로 원격 수업을 받느라 같이 지내던 때이기도 해서 밥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올해 남편이 다른 지역으로 발령이 나 이사를 가면서 나도 가족관사에서 1.5룸 독신자 관사로 옮겨왔다. 혼자 있으면 대충 해 먹을게 분명했으므로 골고루 잘 챙겨 먹기 위해 매식을 결심한 것이다.


올해는 저녁을 밖에서 사 먹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A가 같이 먹자고 했다. 체육관 관리 매니저 일을 하면서 학교 선생님들에게 배드민턴을 가르쳐주는 A도 저녁시간에 혼자 마땅히 갈 데가 없어서 편의점에 가서 대충 먹을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둘이 운동도 함께하고 집 밖에서 집밥 같은 밥을 사 먹는 일도 함께하고 있다.


나는 집안일을 잘하지 못하고 하기도 싫다. 그중에서 특히 부엌일이 제일 어렵다. 부엌일보다는 텃밭에서 삽질하고 풀 뽑고 텃밭 작물들 자라는 모습 지켜보는 일이 더 재미있다. 요리를 하다가도 필요한 재료가 있으면 마트에 다녀오는 남편과 달리 나는 있는 재료만 갖고 음식을 얼렁뚱땅 만드는 편이다. 나는 설거지를 할 때 웬만하면 세제를 쓰지 않고 물로만 닦기 때문에 우리 집 그릇들은 남편이 한 번씩 설거지를 해야 보뜩보뜩해 진다.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해야 하는 시간에 산책하고 텃밭도 가꾸고 책도 읽고 전화 수다도 떨며 놀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서 눈감고 명상도 할 것이다. 명상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누워있다 일찍 자려고 하는 거 아니냐며 '우리 이미자님 또 이미자?' 하면서 식구들이 놀려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다. 식구들이 모여도 이때까지 그랬던 것처럼 웬만하면 시켜 먹거나 가장 시간이 적게 걸리는 요리를 하거나 외식을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나와 가족들의 정신 건강, 육체 건강에 더 이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저녁을 밖에서 먹었을 뿐인데 장 보는 일, 음식 쓰레기 버리는 일, 냉장고에서 유통기한 지난 재료 찾아 버리는 일, 밥 해 먹을 때마다 나오는 비닐 쓰레기 플라스틱 쓰레기 보며 죄책감 가지는 일, 쓰레기 버리러 오가는 일, 싱크대에 쌓인 그릇 보며 스트레스받는 일, 부엌에 서서 허리 아파하는 일 등 많은 일이 줄었다.


먹을 것을 준비하고 설거지를 하는 시간만큼 늘어난 시간은 내 삶을 한결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었다. 퇴근하자마자 배드민턴 운동하고 배드민턴 선생님과 한식 뷔페식당에 가서 밥을 먹고, 집에 오자마자 씻고 7시쯤부터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는 그 시간이 너무 좋다. 졸음에 겨워 저녁 8시 좀 넘어 불을 끌 때면 뭔지 모를 충만한 느낌이 차오르곤 한다.



인제 전통시장에 위치한 놀부네밥상(한식 뷔페, 8000원)



[디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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