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침 Feb 20. 2024

종일, 흐림

- 날씨에 대한 정서적 관찰

검은 나무에서 분리된 남자가 걷기 시작했다. ⓒ 스침

종일, 흐림

# 프리즘

- 젊어서는 흐린 날이 좋았다. 내향성이 강한 사람일수록 작렬하는 태양보다 두꺼운 구름이 햇빛을 충분히 가린 날을 선호하고, 내가 그랬다. 게다가 기압과의 연관성은 모르겠으나 그런 날일수록 술이 당겨 입맛을 다시다가 대작할 친구를 찾곤 했다. 흐린 날, 나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 친구들이 합석해 시간을 죽였다. 그때를 '시간을 죽였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 수많은 술자리가 별로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 개인적으로 포커싱이 잘 들어맞아 피사체의 디테일이 샤프한 것보다 흐릿한 사진을 더 선호한다. 나는 어떤 대상을 명징(明澄)하게 보는 일은 애당초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각기 다른 종류의 프리즘을 갖고 있어 같은 대상이라도 다르게 보기 마련이다. 그러니 나의 아내가 혹은 자식이 나와 다른 생각을 한다고 서운할 일이 아니다.   


ⓒ 스침

# 클리셰(Cliché)

- 관광지에 가면 항상 목격하는 클리셰가 있다. '처녀 셋'이다. 혼자나 둘의 조합은 드물다. 주로 셋이며 그들은 반드시 사진을 찍어달라고 카메라를 건넨다. 과거엔 카메라 기종마다 조작법이 달라 고민이었지만 요즘엔 휴대전화의 촬영 버튼만 눌러주면 되니 사소한 것까지 뭐든 편해진 세상이다.


그들은 제법 몸집이 큰 갈매기들이 여럿 달려들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기야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의 <새(The Birds)>(1966년)를 보았을 나이는 아니다. 다행인 건 그들이 조류 포비아(phobia)가 아니란 사실이다. 사람들은 참 많은 포비아에 시달린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고충을 알기 어렵다.    


- 극도로 내성적이었던 중학생 때 부곡 하와이로 온천 여행을 다녀오던 관광버스 안에서 마이크를 잡았었다. 당시 관광 가이드는 승객들의 흥을 돋우고 자신은 팁으로 가욋벌이를 하기 위해 마이크를 돌렸다. 진행에 이골이 난, 닳고 닳은 가이드의 강요에 마지못한 나는 <인어 이야기>(허림 1974년)란 애조 띤 가요를 불렀다.


"노을빛이 물드는 바닷가에서/ 금빛머리 쓰다듬던 어떤 소녀가/ 울먹이는 가슴을 물에 던지며/ 그리운 그 사람을 기다리다가... 인어가 되었다네 꿈이 변하여/ 인어가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

그 자리에도 어김없이 여행지의 클리셰인 그 '처녀 셋'이 있었고, 그들은 내 노래에 앙코르로 화답했다. 처녀들의 앙코르를 예상 못한 소년은 다음 곡으로 음악 시간에 배운 가곡 <성불사의 밤>(1933년)을 선곡했고, 그녀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인어만큼은 아니겠지만 슬펐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노래 <인어 이야기>에 대해 최근에 알게 된 사실 두 가지. 통기타에 허스키 보이스가 매력적이었던 가수 허림의 인생이 파란만장했단다. 가수와 노래의 연관성이라니. 또 하나는 이 곡의 멜로디가 포크의 전설 조안 바에즈(Joan Baez)의 <The River in The Pines>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이다.   


 

ⓒ 스침

# 또 하나의 클리셰, 갈매기

- 공원엔 반드시 자기 관리에 실패한 비둘기들이 있다. 자신의 영화에 비둘기를 자주 등장시키는 오우삼 감독이 한국 공원의 비둘기들을 봤다면 과연 출연 제의를 했을까? 공원의 클리셰인 비둘기처럼 바닷가엔 갈매기가 고정 출연한다.


- 연륙교가 생겨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지만 강화 보문사에 가려면 외포리 선착장에서 석모도로 가는 배를 타야 했다. 내가 갈매기를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본 게 그 배에서였다. 사람들이 새우깡을 들고 있으면, 갈매기들이 정교한 비행 솜씨로 받아먹었다. 생존 본능은 얼마나 무서운가. 갈매기는 1971년 출시된 새우깡을 언제부터 먹게 되었을까? 나트륨이 34%인 새우깡을 먹는 건 바닷물이 싱거워서일까? 아니면 태국산 미강유와 말레이시아산 팜유가 갈매기 입맛에 맞아서일까? 확실한 건 오늘 아침에도 영종도 선녀바위 해변에서 갈매기들이 새우깡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 스침

# 불투명성

- 운전할 때가 아니라면 안개는 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제다. 안개가 만들어내는 그러데이션(gradation)은 우리말로 치면 농담(濃淡)이다. 짙음과 옅음의 차이가 연출하는 풍경이 맘에 차는 것은 먹그림에 익숙한 유전자 때문인지 모르겠다. 평창 '육백마지기'의 안개가 만들어낸 그러데이션은 평생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아쉽게도 사진이 남아 있지 않다. 그 아쉬움이 그날의 기억을 각색하고 과장하고 있을지도.   

ⓒ 스침

# 낚음

- 주말과부의 원흉이라는 낚시는 시도해 보지 않은 낯선 길이다. 그도 그럴 게 나는 태생적으로 한 자리에 진득하니 앉아 있질 못한다. 지금이야 1차에서 술자리가 정리될 나이가 되었지만 3차가 기본값이었던 시절에도 난 유독 차수 변경이 잦았다. 그러니 낚싯대를 걸고 무릎을 펴지 않는 낚시는 생각만 해도 고역이다. 낚시터에서 먹는 소주가 탐나지만 도전하지 않을 것이다.

ⓒ 스침

- 내가 낚시나 사냥 등속에 눈길을 두지 않는 것은 취식 여부와 무관하게 타자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주는 행위가 싫어서다. 잡았다가 놓아준다고 치자, 그 과정이 얼마나 고통스럽겠는가 말이다. 최소한 나는 그 짓을 하지 않겠다.


-흐린 날 하루가 이렇게 지나갔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