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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r 09. 2024

돈으로 시간을 샀다

파리행 티켓에 대하여

작년의 일이다.



날씨가 좋아, 창문을 열어 두었다. 이따금씩 찾아드는 바람에 책장에 붙은 에펠탑 사진이 살랑거린다. 파닥파닥. 마치 신호를 보내는 것만 같다. ‘어디로든 떠날 시간이야! 여기는 어때?’ 사진 속 파리의 정경을 바라보다 문득 마지막 해외여행이 5년 전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코로나 19가 물러서니, 5월이 다가왔다. 정말 어디로든 떠날 시간이다.



오래 전 책장에 붙여둔 에펠탑 사진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까. “언니, 나랑 유럽 안 갈래?” 절친한 동기가 내게 묻는다. “유럽? 어디?” 나는 좋은 건지 싫은 건지 알 수 없는 말로 되물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였다. 동기는 파리에 함께 가자고 했다. 파리라니, 그녀도 신호를 받은 것일까? 혼자 일본 여행이나 가볼까 하던 차에 동기의 제안이 반가웠지만, 맘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다름 아닌 여행 경비와 휴가.



그때의 나에게 유럽 여행은 저명한 오케스트라 공연의 R석쯤 되었던 것 같다. 갈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당장의 삶과는 동떨어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머뭇거리는 사이, 나를 잘 아는 동기는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아, 언니! 가자, 가자, 가자!” 걱정은 그만하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추석 연휴 때 가더라도 연가 4일은 써야 할 텐데 가능할까? 눈치 보여. “ 나는 신경이 쓰였다. 남에게 폐 끼치는 것을 유난히도 싫어하는 성격 탓이다.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 그리고 조성진



그렇다. 4일의 휴가는 감히 엄두도 못 냈던 일이다.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은 공직생활 내내. 이번에는 내심 가고 싶었는지 업무적으로 무리가 없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얼핏 보니, 항공권은 200만 원이 훌쩍 넘는 금액이다. 카드값은 꽤 무리일지도 모르겠다. 휴가 이야기를 꺼낼 일도, 생각지 못한 거금을 쓸 일도, 모든 것이 걱정 투성이었지만 우린 결국 떠나기로 했다. 머나먼 파리로.



비행기값으로 2,679,400원을 결제했다. 꼭 가고야 말겠다는 강렬한 열망이 투영된 숫자였다. 보통 때보다 100만 원 정도를 더 주고 8박 10일을 산 것이다. 그렇게 난생처음 손에 쥐게 된 파리행 티켓. 그동안 여행은 어쩌면 마음의 일이었을까? 나를 가로막은 것은 돈이나 시간보다는 나 자신이었는지 모른다. 가장 큰 허들을 넘었다고 생각하니, 바보 같이 좋았다.



난장판. 이민이라도 가는 것일까?



그런데 나는 바보 같은 것이 아니라 그냥 바보였다. 너무 설렌 나머지, 두 달 전부터 가방을 싸기 시작한 것이다. 막상 여행이 결정되고 나니, 빨리 가고 싶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누가 봐도 유럽 처음 가보는 사람) 짐이라도 챙겨야 이 괴로운 시간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의 캐리어는 10일 간의 꿈과 희망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꼬박 두 달을 고민하고 나서야 지퍼를 닫을 수 있었다.



환상적인 날씨에 우중충한 패션



결과는 대실패. 누구보다 완벽한 짐을 꾸리고 싶었던 나의 장기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정작 입을 옷이 없어 사진만 봐서는 그날이 그날이다. 두 달 동안 대체 무엇을 챙긴 걸까? 돈으로 시간만 사고 옷은 안 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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