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을 잃어버렸다
밀려들어오는 행인들의 시선이 싫지 않은 것은 어떤 까닭일까.
무사히 런던에 도착했다는 안도는 일말의 우쭐함이 되어 흐트러진 안색에도 우리를 창가에 머무르도록 한다. 여느 때와는 달리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앞에 둔 나는 수수한 옷차림의 런더너들을 끊임없이 응시하며 충만한 만족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출근 준비에 여념이 없을 오전 7시 30분. 우리는 갓 구워낸 크루아상을 즐기며 꽤 괜찮은 아침을 만끽하고 있다. 앞으로 다가올 시련은 전혀 알지 못한 채. 이곳은 우리가 묵는 호텔에서 도보 1분 거리에 있는 카페, ‘Noxy Brothers’다.
평소 커피를 자주 마시지 않는 나에게 아메리카노 한 잔은 9시간이라는 시차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에 가까웠다. 공시를 준비할 때에도 8시간 수면을 고수했던 나는 유독 잠에 취약한 편이라 잠을 설친 날이면 그 여파가 꼬박 하루를 간다. 어제만 해도 런던에서의 첫 일정을 소화하느라 2만 보 넘게 걸었지만 발끝의 고단함은 30년 넘게 다져온 수면 사이클을 이기지 못했다. 뒤척이던 나는 새벽 4시 언저리 화장실에 다녀오는 길에 일어나 있는 동기를 발견했고, 우리는 피곤함 따위에 결코 지지 않기 위해 한국인의 뜨거운 매운맛을 보여주었다.(배고픔에는 진 것 같기도.)
영국의 정취란 흐린 날씨나 퀼팅 재킷이 전부는 아니었다. 런던은 생각보다 자주 화창했고 도처에 보이는 빨간색 2층 버스는 정돈된 거리에 활기를 더해주었다. 버스를 타고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향하는 길에 2층에서 바라본 킹스 크로스역은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고, 9와 4분의 3 승강장을 통해 우리를 꿈과 모험의 세계로 데려가줄 것만 같았다. 이러한 공상에 잠긴 나를 깨운 것은 다름 아닌 세인트 폴 대성당의 황홀한 자태다.
30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런던의 스카이 라인을 지키고 있는 세인트 폴 대성당은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더불어 영국을 대표하는 종교 시설이다. 성당에 들어섬과 동시에 화려한 그림과 장식들로 바닥부터 벽 그리고 천장까지 어느 곳 하나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헨리 무어의 ‘마더 앤 차일드’에 떨어지던 빛과 미색의 곡선은 너무나도 온화했고, 차가운 물성으로 치부했던 조각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수백 개의 계단을 지나면 돔의 꼭대기, 골든 갤러리에 당도한다. 마치 수행과도 같은 좁다란 계단의 끝에는 시원한 바람과 함께 탁 트인 런던의 전경이 기다리고 있다. 도시에 드리워진 구름을 찌를듯한 기세의 더 샤드 그리고 템스 강을 가로지르는 런던의 랜드마크 타워 브리지를 조망하며 숨을 고르니 겨우 정신이 든다.(사실, 중간에 포기할 뻔했다.) 근처 식당에서 따뜻한 응대와 스테이크로 배를 채운 우리는 타워 브리지와 런던탑의 웅장함에 또 한 번 매료되었다가 스타벅스에서 체력을 보충했다.
템스 강을 서성이던 나와 동기는 홀린 듯이 밀레니엄 브리지를 따라 테이트 모던으로 향한다. 처음부터 미술관에 가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유럽에서 가장 우아하게 화장실을 갈 수 있는 곳은 아무래도 미술관이다. 현대 미술에 새로운 영감을 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 ‘샘’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곳에 머무를 이유는 충분했다. 잭슨 폴록, 몬드리안 등 세계적인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들과 함께 오후가 유유히 흘러간다.
런던에서의 일정은 평화롭게 마무리되어 가는 듯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대영 박물관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파리로 돌아갈 참이었다. 우연히 만난 테이트 모던까지 모든 것이 좋았던 오늘의 런던은 이제 우리에게 뮤지컬 '레 미제라블'을 선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드하임 극장에서 가까운 벤스 피시 앤 칩스 레스토랑 안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메뉴를 살펴볼 겨를도 없이 피시 앤 칩스 두 접시를 시킨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적을 깬 건 동기였다. 가방을 뒤적이던 동기는 갑자기 나를 보며 말했다. "나 여권이 없어." 런던의 클라이맥스에서 우리는 뮤지컬 제목처럼 '불쌍한 사람들'이 되었다.
당황한 동기가 여권의 행방을 되짚는 동안 나는 식당 직원에게 휴대폰을 빌렸다. 대사관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대사관이 전화를 받지 않자 낙심한 나는 자리로 돌아와 가장 의심스러운 분실 장소 중 하나인 스타벅스의 연락처를 찾아본다. 때마침 직원이 다가와 콜백이 왔다며 휴대폰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전화하셨죠?" 수화기 너머의 다정한 목소리에 나는 거의 울 뻔했다. 담당자는 서류를 챙겨 내일 아침 9시까지 대사관으로 오라고 안내해 주었고, 그제야 우리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차갑게 식은 피시 앤 칩스를 뒤로 한 채 식당을 나온 우리는 맥도날드에서 끼니를 때우며 긴급 여권으로 파리에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을 나눴다.
웨스트엔드의 밤은 야속하게도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손드하임 극장 안은 생각보다 아담했고, 그 덕에 무대가 잘 보였다. 어두운 조명과 편안한 의자에 긴장이 풀려버린 나는 무려 세계 뮤지컬의 중심 영국 웨스트엔드에서 하염없이 졸았다. 떨어지는 눈꺼풀과 고개를 가눌 재간은 나에게 없었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은 조금 비싼 자장가가 되었고, 인터미션이 끝날 때까지 뒤에 앉은 관람객은 돌아오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나마 잠결에 들은 것도 같은 대사 한 마디는 우리에게 힘이 되어준다.
A little fall of rain can hardly hurt me now.
비 조금 맞는다고 다치지 않아.
그렇다. 여권 하나 잃어버렸다고 세상이 끝나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