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여권으로 파리에
정돈하고 싶은 날이다.
책장을 정리하던 나는 켜켜이 쌓여있는 책무더기 속에서 이우환 작가의 책을 발견했다. 그의 작품 세계를 도록처럼 엮어낸 책은 먼지 때문인지 하얀 표지가 살짝 바랜 모습이었다. 하던 일도 잊은 채 책 속에 빠져들다 불현듯 시선이 머문 곳은 한 문장이다.
“작품이란 뭔가를 완성하는 것과 미완의 것, 칠하는 것과 칠하지 않음의 장소가 서로 공명할 수 있도록 연결되는 현장이다.”
런던 웨스트민스터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주 영국 대한민국 대사관. 대사관이 호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은 일말의 위안이었다. 원래대로라면 호텔에서 느지막이 몸을 일으켜 파리로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을 테지만. 우리는 대사관 맞은편에 있는 어느 카페의 창가에 앉아 출입구만 흘끔거렸다. 묘하게 흐르는 긴장감 속에 따뜻하게 데운 샌드위치와 갓 내린 커피에서는 여느 때와 같은 여유를 찾기 어렵다. 간단히 끼니를 때우며 대사관이 열리기만을 기다린다.
동기는 현금을 인출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나는 캐리어와 짐 가방을 지키며 바깥을 탐색한다. 런던에서 보내는 마지막 아침을 시야에 부지런히 담아보다가 이내 다시 초조해진다. ‘혹여나 나 혼자 파리에 가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 오른손에 든 포크로 온기가 남은 애꿎은 샌드위치만 만지작거리다 입 안으로 가져가기를 두어 번 반복한다. 대사관 담당자와 약속한 대망의 9시가 다가오고 있다.
적갈빛이 감도는 주영한국대사관 앞에 다다랐을 때 머리 위로는 태극기가 펄럭였다. 여전히 낯설기만 한 런던에서 만난 태극기는 반가움 그 이상의 존재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더 반가운 인사. “안녕하세요?“ 1층 안내데스크 직원이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음성에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 본다. 우리는 여권 발급 창구에서 접수를 하고 관련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한창 서류를 작성하는데 아래층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계단을 올라오는 우리 또래의 남자 두 명.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우리만은 비켜가길 바랐던 해프닝은 또 누군가의 일이 되어있었다. 한편 동기의 여권 발급은 생각보다 훨씬 순조로웠다. 대사관에 도착한 지 30분 만에 긴급여권이 나온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포기했던 영국 박물관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파리 입국도 문제없을 거라는 직원 분의 설명을 듣고 나니 마음이 놓였다.
“언니라도 박물관에 가서 구경해!” 여권을 잃어버렸을 때, 동기는 나를 혼자라도 박물관에 보내려고 했다. 미안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빨리 나와준 여권 덕분에 런던의 기억은 영국 박물관과 에그 베네딕트로 막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둘이 함께. 때로는 걱정과 현실은 반비례의 관계에 있나 보다. 루브르 박물관, 바티칸 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국립 박물관인 이곳. 자칫 놓칠 수도 있었던 순간이 지금 우리 앞에 있다.
이집트 로제타 스톤, 람세스 2세의 석상부터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여러 조각들까지. 이곳에는 어떻게 옮겨왔는지 가늠조차 어려운 유물들로 가득했다. 유물 반환 이슈로 인해 계속되는 갈등에도 여행자에게는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명소임에 틀림없었다. 영국은 소장 문화재를 영구적으로 반환하지 못한다는 자국법을 근거로 장기 대여만 하고 있는 실정이다. 주요 유물들만 둘러보았는데도 시간은 어느덧 2시간을 훌쩍 넘어 정오가 되었다.
화창했던 날씨처럼 완벽하기도 어수룩하여 불완전하기도 했던, 그래서 여행같은 여행이었을 런던. 이곳 런던을 뒤로하고 새로운 진동을 느끼기 위해 다시 세인트 판크라스 역을 찾았다. 우리를 파리로 안내해줄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신다. 눈앞에는 이름 모를 젊은 음악가의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수더분한 외모와는 다르게 사람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거침없는 타건은 나의 눈과 귀를 오래도록 잡아두었다.
우리가 파리에 도착한 건 저녁 8시 무렵이었다. 상대적으로 치안이 괜찮다는 15구의 어둑해진 거리에서 나는 신나는 마음을 누르려 가방을 단단히 고쳐멘다. 동기와 나는 호텔까지 무사히 도착하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려보기로 했다. 그러다가도 택시 안에서 저 멀리 빛나는 에펠탑을 발견하고는 탄성을 터뜨려버렸다. 진짜 파리다. 호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근처 마트에 다녀와보기로 한다. ‘과연, 납작 복숭아가 있을까?’
파리에 도착하면 매일 사먹어야지 다짐했던 납작 복숭아를 만났을 때의 그 반가움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