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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Apr 18. 2024

런던표 쌀국수의 맛

차이나 타운 인 런던

“런던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이 뭐예요?”



여행에서 돌아온 나에게 사람들은 이렇게 물었다. 나의 대답은 일단 '피시 앤 칩스'는 아니라는 것. 여권 분실 사태로 인해 영국의 대표 요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우리였으니 말이다. 나는 벤 사장님의 작은 식당 안을 헤집고 다니다 대사관과의 극적인 전화 연결 후에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았다. 남자 직원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우리의 접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다가와 부드러운 표정으로 “포장해 드릴까요?”라고 묻는다. 그럴 정신이 없었던 우리는 매몰차게 “No, no, no.” 완곡하지 않은 거절 의사를 표시했다. 영어는 기세라더니, 엉뚱한 순간에 가장 유창하다.



런던 차이나타운 거리의 모습



고스란히 남은 두 접시의 피시 앤 칩스는 전날 ‘비엣 푸드’에서 느낀 감동을 환기해 주었다. 여독을 달래는 뜨끈한 쌀국수의 기억은 이다지도 강렬했던 것일까. 런던의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비엣 푸드는 줄을 서야 하는 유명한 베트남 음식점인데, 다행히 알맞은 시간에 도착한 우리는 2층 다인석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었다. 낯선 사람들과 함께 한 테이블에 둘러앉은 모습은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했다. 자연스럽게 쌀국수와 볶음밥 그리고 스프링롤까지 총 세 개의 메뉴를 주문한다. 부족함 없는 맛과 다정한 직원들의 태도는 한국에서 온 지친 여행객에게는 응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생각나는 이날의 저녁 식사



노곤한 몸에 매콤한 국물과 기름진 밥이 들어가니 피로감이 한결 누그러진다. 문득 30대 중반에 접어들었음을 실감케 하는 것은 영광보다는 대개 이러한 순간들이다. 영국까지 와서 굳이 베트남 음식에 감격하는 30대의 나는 런던 특유의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다.(파리는 가보지도 않고서.) 내가 기억하는 런던은 벤스 피시 앤 칩스에서 먹었던 소금 간을 하지 않은 담백한 감자튀김의 맛. 마구 담아낸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모양에서 묻어나는 정갈함이 피시 앤 칩스를 닮은 런던의 매력 아닐까.



영국의 상징, 근위병 교대식



이른 아침부터 난생처음 보는 모양의 샤워기와 실랑이를 하고 온 참이다. 9시가 조금 안된 시각, 버킹엄 궁전의 근위병 교대식을 맨 앞에서 보기 위해 2시간을 서둘러 도착했다. 견고한 철문 너머의 버킹엄 궁전은 그런 실랑이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왕실의 의연하고도 근엄한 모습을 보여준다. 계획대로 소위 명당자리에서 바라본 근위병 교대식은 정교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더없이 빛나던 붉은색 제복과 파란 하늘의 대비는 적당히 불어주던 바람과 함께 여전한 감각으로 남아있다.



우리에겐 옆 테이블의 남자 두 명보다 샐러드 하나가 더 있다.



교대식이 끝나고 구글맵 별점 4.7의 ‘Pizza pilgrims victoria’에서 점심을 먹는다. 각자 피자 한 접시에 샐러드까지 주문했지만, 스텝은 그 어떠한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별점 추가합니다.) 맛있는 피자를 동력 삼아 우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걸음을 옮긴다. 너무 힘차게 다른 사원에 들어간 우리는 전부 둘러볼 때까지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른 곳에 와있음을 발견한 사람은 뜻밖에도 나였다. 처음으로 자신 있게(?) 이견을 내본다. “이거 안 맞아…” 나도 길을 찾을 때가 다 있다.



진짜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찾았다.



영국의 역대 왕과 유명한 위인들이 잠들어 있는 진짜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인파로 가득하다. 소란스럽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살아 숨 쉬는 영국의 오랜 역사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마치 삶과 죽음의 사이 그 어디쯤에 와있는 듯한 이곳은 런던의 주요 관광 명소. 여러 왕들을 비롯해 이름만 들어도 아는 아이작 뉴턴, 찰스 다윈. 이들의 무덤을 보며 인생의 유한함과 동시에 밀려오는 삶을 향한 무한한 의욕은 새삼 여행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영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내 눈앞에 있다니!



그림같은 런던아이 그리고 빅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은 하늘 아래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가방 속 작은 우산이 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런던의 9월은 나에게 잊지 못할 계절이다. 우산으로는 도리어 내리쬐는 햇빛을 가려야 할 정도였으니.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템스 강을 향해 걸으면 또 하나의 상징 빅벤을 만날 수 있다. 템스 강 위로 길게 뻗은 웨스트민스터 브리지에 기대어 시계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우리. 카메라 앵글 밖 서로의 현실을 마주하다 적당히 타협을 마치고 벤치를 찾아 떠나기로 한다. 한참을 걷다 털썩 앉아 저 멀리 관람차를 응시하니 지금 이 거리가 꿈처럼 느껴지는 기분이다.



트라팔가 광장 앞 내셔널 갤러리



우리가 트라팔가 광장에 도착할 무렵, 만보기의 숫자는 어느덧 2만을 향해가고 있었다. 역시나 꿈은 아니다. 얼마 남지 않은 체력으로 미술관의 주요 작품을 둘러보기로 한다. 영국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관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예술이 일상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내셔널 갤러리 앞은 독특한 헤어 스타일의 아티스트가 들려주는 기타 연주와 분수에서 흐르는 물소리 그리고 저마다의 이야기가 뒤섞여 생동한다.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하나의 거대한 그림처럼.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예술은 거장들의 세계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일상이 곧 예술이다.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만큼 지쳐있었고, 우리는 최대한 트라팔가 광장 가까이에서 저녁을 해결하기로 한다. 차이나타운에 있는 비엣 푸드를 향해 걸어가니 등 뒤로 그림같던 장면들이 서서히 멀어진다. 고흐는 말했다. 보통은 포장된 길이라 걷기는 편하지만 꽃은 피지 않는다고. 이토록 힘든 여행일지라도 아름다움은 여러 모양으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고단한 하루의 끝에 만난 기가 막힌 쌀국수처럼. 고흐의 ‘해바라기’ 같이 아주 강렬한 인상으로 말이다.



런던에서 가장 맛있게 먹은 음식은 결국 쌀국수라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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