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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Mar 20. 2024

길치가 유로스타를 탈 때

낭만과 현실 사이

영화 속 파리에는 언제나 낭만이 가득했다.



우정과 사랑 그 엇갈림의 서사 끝에 엠마와 덱스터(영화 <원데이>의 두 주인공)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거리. 앤디가 미란다(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비서 그리고 패션잡지 ‘런웨이’의 편집장)의 전화를 거부한 채 자신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던 광장. 내가 애정하는 영화 속 장면에는 사랑과 가능성의 도시, 파리가 있었다. 영원히 관념 속에만 자리할 것 같았던 파리는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에펠탑 앞에서 즐기는 와인 한 병 그리고 파리의 야경



낭만의 도시에서 영국의 수도, 런던이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다. 파리에서 런던까지는 고속철도 ‘유로스타’로 2시간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예정에 없었던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는 또다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런던으로 떠나는 일정을 감행하기로 한다.



관건은 유로스타 탑승 한 시간 반 전까지 파리 북역에 도착하는 일이었다. 유로스타를 타려면 샤를드골 공항에서 북역으로 이동해야 하는데,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국경을 넘기 때문에 출입국 심사 등 수속에 시간이 걸리는 탓이다. 21:13행 기차를 무사히 타기 위해서는 공항-파리 북역-유로스타 탑승까지의 여정을 한 치의 실수 없이 마쳐야 한다. 영화가 아닌 현실에도 낭만은 있을까.



우리의 one day 일정

- CDG 18:05 도착 및 캐리어 찾기

- CDGVAL 셔틀 탑승 후 해당 터미널 이동

- RER B 노선 철도로 파리 북역까지 이동(약 30분 소요)

- 유로스타 출입국 심사 등 수속 및 21:13 탑승

-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역 도착 및 숙소 체크인



난도 최상의 코스다. 비행기 연착, 캐리어 분실 그리고 RER B 파업 등 예상되는 변수는 무척이나 다채로웠다. 세련된 숏컷의 엠마는 네이비 원피스를 휘날리며 우아한 고갯짓 몇 번에 덱스터를 만났지만, 나는 엠마가 아닐뿐더러 심지어 길치다. 고대하던 우리의 one day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런던으로 갈 수 있는 그저 지난한 현실일지도 모르겠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서 북역으로 향하는 중이다.



역사 안은 각지에서 모인 여행객들로 붐볐다. 파리 북역에 도착한 기쁨도 잠시, 런던 입성이 코앞인데 유로스타 터미널이 보이질 않는다. 인간 내비게이션인 동기도 속수무책인 상황이다. 영어 담당인 내가 나설 차례다. 저 앞에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가드에게 터미널로 가는 길을 물어보기로 한다. 안 그래도 짧은 나의 영어까지 막아버릴 기세로 서있는 그에게 나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Where is the Eurostar..."



파리 북역. 유로스타 탑승 플랫폼으로 가고 있다.



모습을 드러낸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커다란 시계는 밤 11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시간여행이라도 한 것처럼 한국보다 9시간이 느린 이곳은 런던이다. 늦은 밤, 한산한 세인트 판크라스 역은 지칠 대로 지친 우리에게 'I want my time with you.'라고 적힌 분홍색 인사를 건넨다. 시차 때문에 피곤했지만, 덕분에 우리의 첫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역에 도착했다. 시작이 좋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동기가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언니, 나중에 나랑 여행 또 같이 가줄 거지?" 동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나의 반응을 살피는 눈치였다. 그런데 이건 내가 해야 할 질문인 것 같은데. 형편없는 공간지각 능력에 영어를 못하는 영어 담당이라도 괜찮다면 나는 언제든 준비가 되어있단다.



나를 받아주는 동기 덕분에 길치도 여행을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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